오후에 편지지를 샀어. 답장을 쓰고 싶었거든. 물론 쓰지 못하겠지. 당신이 주소를 꽁꽁 숨겨 둬 버렸으니까. 자판기로 쓴 글자에 영혼의 살만 남겨지고 있다면 손으로 직접 쓴 글자에는 영혼의 뼈와 살이 깃들어 있는 같은 느낌이 들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손 편지를 전해 줄 생각을 했는지...... 편지를 받고 역시 당신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래, 늘 이렇게 비밀스럽게 뭔가를 준비해두고 있다가 문득 내놓는 것으로 말문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당신이었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도, 당신이 무사함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한데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로 나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전해온 당신이란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했어. 눈물로 편지를 적시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행복하다는 말을 되뇌게 됐어.
당신의 손을 매만지듯 손 편지 속 글자를 천천히 매만졌어. 한 글자 한 글자에 당신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어. 잉크의 흔적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이 아무래도 너무 좋은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라.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 당신도 편지를 쓰며 울었던 건지 편지 아래 남겨진 투명한 흔적이 내 눈에는 어쩐지 눈물자국인 것 같이 느껴졌어.
그래서 당신의 눈을 매만지듯 엄지로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을 천천히 쓰다듬게 됐어.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울지 마. 혼자가 아냐.」라는 말을 끝없이 속삭였지. 그 말을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 당신 때문에 나는 거의 매일 울고 있는데 정작 당신에게는 울지 말라고 하는 내 모습에 웃음도 났고. 심장이 헐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픈데도 나, 당신만큼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아픔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고 있었어. 나는 아파도 당신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게 사랑인가 봐.
너무 많이 울어서였을까. 눈앞에 놓인 오돌토돌한 종이와 그 속에 담긴 사연과 시간이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게 느껴졌어. 편지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멍해졌어. 초점 없는 눈에서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고 까만 눈동자에 손을 잡고 글자 사이사이를 천천히 걷는 당신과 내 모습이 새겨지고 있었어. 당신이 내게 부쳐 온 편지지 구석구석 손깍지를 끼고 서로를 바라보며 걷는 당신과 내 모습이 깃들어 있었어. 멍하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두 손으로 편지지를 쥔 채 계속 편지를 바라보고 있게 됐어. 그렇게 편지를 보고 울고 있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던 것 같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편지가 곁에 놓여 있더라. 울다 지쳐 잠들어서 인지 이게 뭐지 하고 순간 멍해졌어. 「나는 괜찮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하는, 편지에 눌러 담은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이 손이 되어 나를 안아줬어. 동그란 당신의 손가락을 만지듯 손가락으로 편지 위에 당신 이름을 썼어. 이름을 쓰는 것뿐인데 마음이 아려오더라.
죽어도 맞잡은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당신 말이 가슴에 새겨졌어. 두 손에 당신과 내가 함께 마주해 온 우리의 시간이 풀이 놓였어. 차갑게 식었던 손에 온기가 돌았어. 그게 얼어붙은 것 같던 내 심장을 녹여주고 있었어. 당신 편지가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을 또 한 꺼풀 더해 버렸어. 편지를 손에 꼭 쥐는데 손깍지를 낀 당신과 내 손이 보여. 하나가 된 두 개의 손을 보며 속삭여.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