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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Oct 27. 2018

대학의 죽음

최근의 ‘강사법’ 논란을 지켜보면서 
지성의 선배들처럼 대학을 탈출하라!

대학의 존재는 당연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고급 지식의 생산과 교환, 교수와 학습은 대학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학의 역사가 이를 보여 준다. 사사키 아타루의 『제자리걸음을 멈추며』(여문책)에 따르면, 13세기 초 중세 유럽 대학이 탄생한 이래, 현재까지 대학은 몇 번이고 죽음을 맞았다.

대학의 존재는 당연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대학의 첫 번째 죽음은 14세기 페스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렸던 중세대학은 왕실과 교회에 예속되면서 정체되기 시작한다. 단테의 자국어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라틴어에 얽매여 낡은 체제의 꿀을 빠는 데 정신이 나간 데다, 성서의 권위를 위험에 빠뜨리는 실증주의 역사학을 부정함으로써 비판적 사유의 근거를 잃어버린다. 이슬람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꽃 피우기 시작한 자연과학의 발전 역시 성서에 위배되니 당연히 수용하지 못한다. 이런 수준의 대학이 안 망할 리 없으니, 출판 인쇄기술의 발달에 따라 지식의 새로운 유통경로가 마련된 이후 사실상 무력화된다. 대학의 죽음이다.


썩어빠진 대학을 대신해 학문을 구한 것은 아카데미다. 노인들이 모여서 좋았던 옛날을 회고하는 ‘○○원’ 같은 곳이 아니다. 방대한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을 왕립 또는 국립으로 세운 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에 내놓고 의견을 나누고 싶어 하는 지식인의 사교장이다. 오일러,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 라이프니츠는 대학 교수가 아니라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국민공회는 좀비상태로 그냥저냥 버티던 대학을 아예 폐지해 버린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말이다.


대학의 기적적 회생은 훔볼트가 수립한 베를린 대학부터다. 직업교육이 아니라 전인적 교양교육과 연구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근대대학의 탄생이다. 교수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발명하고, 교육은 그 지식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이며, 학생은 공부를 통해 인격을 도야하는 동시에 의견을 통해 지식 생산에 참여하는 지성의 전당이 마련된 것이다. 학문이 대학의 중심에 서고, ‘고독’하게 지식을 탐구하고 ‘자유’롭게 생각을 교환하면서 인간성 자체를 고양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학의 이념형이다. 


사사키 아타루, 『제자리걸음을 멈추며』, 김소운 옮김(여문책, 2017)

동시에 새로운 지식의 추구 여부를 측정하는 업적주의도 도입된다. ‘세습 교수’들이 장악한 타락한 대학에 맡겨두면, 시답잖은 논문들로 성과를 주고받는 내부자 잔치판이 되어버릴 게 빤했기에, 훔볼트는 대학의 인사권을 차라리 국가에 떠넘긴다. 이로써 훔볼트가 꿈꾼 ‘고독과 자유의 대학’은 처음부터 국가에 예속된 상태로 출발한다. 


초기에는 피히테, 셸링, 헤겔이 교수로 가르치고, 하이네, 슈티르너, 마르크스가 학생이었으니 아슬아슬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대학의 죽음이 또다시 시작된다. 부르주아지와 귀족에 점령당해 도련님들 사교장이 되고,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관료나 직장인 되는 길을 가르치는 직업학교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치에 대한 자발적 추종이다. 대학은 다른 어떤 사회 영역보다 빨리 나치즘을 수용한 후, 저항자를 박해하고 유대인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대학은 죽었다. 하이데거를 보라. 이 시기에 교수로 산다는 것은 밥벌이를 위한 치욕이 되거나 집단적 광기의 이념적 부역자가 될 뿐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학 자체가 아니라 연구소에서 탄생했다.


지금, 대학의 또 다른 죽음이 한국에서 진행 중이다. 연구와 교육의 질을 아랑곳하지 않는 파행적 운영 때문이다. 때때로 강의를 나가며 느끼는 대학의 실상은 처참하다. 국가와 결탁해 제 복리를 위한 돈을 챙기느라 학생 취업률을 사실상 첫째 평가 지표로 받아들이면서 대학은 국문과도, 사학과도, 철학과도, 수학과도, 물리학과도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로 변태했다. 하지만 프라임 사업 지원금 등 정부가 배분한 달콤한 꿀 덕분인지, 구성원 대다수에게서 아무런 수치도, 저항도 보이지 않는다. 제 발이 썩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대부분 학문 후속세대에 속하는 강사들 처우는 입에 담기 민망할 지경이다. 3시간 강의료가 20만 원에도 못 미치는 경악할 수준에다 학사 관리 등에 필요한 각종 서류는 산더미 같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수정해 돌려주거나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강의에 딸린 각종 업무를 처리하는 비용은 지불하지 않으니, 학생들 사랑에 열정노동을 할 위대한 마음을 품지 않는 한 수업만 딱 진행하는 게 당연하다. 그 시간에 자기 공부하고 도서관 강연이라도 한 차례 더 뛰는 쪽이 낫다. 시험도 사지선다로 출제하고픈 게 솔직한 기분일 것이다. 심지어 모 대학은 전자자료 이용료가 올라가자 다음 학기 강의를 맡겨 놓고도, 방학 중 전자도서관 이용을 불허할 정도로 야박했다. 


강사 처우를 개선하자는 이른바 ‘강사법’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면, 지성의 운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치졸하다. 강사한테 수업을 맡길 때, 강의를 6시간 이하 원칙으로 최대 3년까지 재임용 절차를 보장하고, 방학 때도 작으나마 임금을 주며, 4대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하자는 게 전부인 법이다. 햄버거체인의 장기 알바생한테도 적용되는 상식적 처우다. 이에 대한 대학 당국의 대책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강사법 개정안 주요 내용(출처: 중앙일보)

재정 압박을 이유로 전임교원의 강의시수를 늘리고, 각종 교양 강좌를 통폐합해 학생 숫자를 수업마다 60~70명까지 끌어올리며, 심지어 출강강사한테 외부 직업을 억지로 얻게 한 후 겸임으로 수업하도록 하는 방안을 은밀히 권하는 등 파행운영에 골몰하는 중이다. 질 나쁜 교육을 받을 학생 입장은 아랑곳없다. 이대로라면, 현실적으로 소수의 강사들은 법 혜택을 볼지 몰라도, 대다수 강사들은 수업을 할 수 없는 ‘강사 학살’이 불을 보듯 하다. 한 대학에서는 시간강사 150명을 50명으로 줄이라고 학과들에 통보한 모양이다. 이러한 좀비 대학이 오래갈 리 없다. 아니, 오래가선 안 된다.


조만간 진짜 공부를 하고 싶은 이들이 대학을 탈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선배들도 그랬다. 학문은 대학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페트라르카, 에라스뮈스, 라블레, 몽테뉴는 읽고 생각하고 쓰고 책을 냈을 뿐이다. 베이컨, 데카르트, 파스칼, 홉스, 루소, 볼테르는 서신 교환, 살롱, 연구회, 독서회, 강연회 등으로 학문을 했다. 스피노자는 안경알을 갈고, 괴테는 행정문서를 만졌다. 어떻단 말인가.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려다 사유가 망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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