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급제를 바라는 과객의 심정으로...
4월의 문경은 풍경에 진심이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무수한 초록의 질감들이 상춘객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문경새재는 여정에 없던 여행지였다. 몽골 여행을 하고 싶었다. 몽골의 맑은 밤하늘에서 은하수와 별을 보고 싶었다.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포기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귀정사 템플스테이 이후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는 상현 씨가 겨우내 머물고 있다는 괴산의 한 공동체 삶터부터 들러 짧은 만남을 가졌다. 트렁크에 캠핑 장비를 실었지만 목적지는 미정이다. 점촌 시내의 모텔에 하루 머물렀다. 모텔 벽을 뚫고 들려오는 남녀상열지사의 새벽은 싱숭생숭했다.
다음날 목적지를 문경새재로 정하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캠핑장은 문경 진흥공단에서 위탁 운영한다. 이용료는 이만 원이다.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해 ― 4월부터 예약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 캠핑장 위치가 높고 차를 사이트에 바로 대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 데크마다 전기도 들어오고 캠핑장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다웠다.
솔로 캠핑은 이번이 처음이다. 텐트를 치는 몸짓이 서툴다. 삼십 분여 낑낑댔더니 텐트가 완성되었다. 새벽에 춥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캠핑장 관리소 직원이 지나가다 왜 타프는 안 치냐고 묻는다. 캠핑이 처음이라고 했더니 웃으신다.
“산이라 밤이 되면 춥고, 새벽엔 고라니랑 멧돼지가 나타나서 겁을 주기도 해요.”
지나가며 농을 던지신다. 까짓것 고라니랑 같이 놀지 뭐. 외부의 힘보다 내부의 힘이 강한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아직은 밤에 추울 텐데 핫팩이나 전기장판이 있어야 할 거예요.”
해가 지자 바람이 불고 새벽녘에는 추웠다. 새벽 찬 바람이 얇은 텐트를 비집고 들어왔다. 간간이 산짐승 소리도 들렸다. 자다가 추워서 두 번이나 깼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서 몸을 벌레처럼 웅크렸지만 두 발이 시렸다. 궁여지책으로 헤어드라이기를 켰다. 이불 안이 금방 따듯해졌다. 하지만 새벽 찬 공기는 드라이기의 온기를 금세 빼앗는다.
햇반과 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문경새재를 걸었다.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 가는 게 목표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과거를 보는 선비들이 한양으로 가던 길이다. 새재라는 말에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제1관문을 지나면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드라마 촬영 장소인 오픈세트장과 조령원터, 동화원, 그리고 장원급제 길이 나오고 교귀정(交龜亭), 산불됴심비,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으로 이어진다.
매표소에서 이천 원에 입장권을 사고 오픈세트장부터 들렀다. 제1관문까지는 전동차를 타고 갈 수 있다. 평일인데도 관광객들이 제법 보였다. 마주 오는 전동차에서 귀에 익숙한 동요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전동차에 탄 승객들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광화문과 경복궁 등 오픈세트장은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고려와 조선시대의 거리와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을 촬영했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바위 길가에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부하들에게 했던 대사가 적혀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광화문과 경복궁을 보고 반대편 초가집 세트장으로 향했다. 초가 입구의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이 어릴 적 살던 시골집을 연상시킨다. 앞을 보며 걷는데 좌, 우, 정면으로 풋풋한 커플 셋이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어주고 있다.
최근에 복원된 듯한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외로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를 보러 문경새재를 넘던 과객들이 하룻밤 묵던 시골집이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는 조령원터가 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터벅터벅 새재를 넘다보니 조선시대 후기에 세워진 ‘산불됴심’ 표지석이 보인다.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표지석이 인상적이다.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제2관문까지 세 시간 남짓 걸었더니 제법 출출하다. 관문을 지나자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성 네 명이 바위 사이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시원한 약수를 한 모금 들이켜니 살 것 같다. 공원 입구 편의점에서 산 빵과 바나나 우유로 허기를 달랬다.
하산하는 길은 수월했다. 출발할 때 눈여겨 두었던 식당에서 더덕구이 정식을 시켰다. 식당마다 보이는 메뉴판이 무척 크다. 커다란 메뉴판 아래 작게 쓰인 영문은 어설픈 영어가 아닌 한글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했다. 빨간 양념이 잘 밴 더덕구이 향이 막힌 코를 자극한다. 침이 고인다. 식감도 좋고 된장찌개와 반찬도 맛이 깔끔하다. 공깃밥이 모자라 하나 추가했다.
첫날은 새벽에 두 번이나 잠이 깰 정도로 추웠는데 이튿날은 몸이 적응한 탓인지 별로 춥지 않았다. 사방에서 아침을 깨우는 향기와 소리들이 밤새 굳었던 몸을 풀어주고 두 귀를 맑게 열어준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4월에만 볼 수 있는 무수한 질감의 초록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스스로를 마음껏 뽐낸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의식으로 텐트 안에서 보는 주흘산의 일출이 장관이다. 주흘산 일출은 예상하지 않은 선물이다. 빛의 명암에 따라 나무와 꽃으로 가득한 산야의 풍경을 다채롭게 수놓는다. 자연이 내게 주는, 함부로 계량할 수 없는 선물이다.
에머슨의 ‘자연’, 소로우의 ‘월든’이 이러했을까? 이쯤 되면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노 시인의 부름으로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 꽃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이곳에 만개한 꽃들은 누군가의 부름 이전에 꽃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발견자가 아니라 단지 그 향기와 곁을 스쳐 가는 낭인이다.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과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비경을 바라볼 눈이 있어,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귀가 있어, 무엇보다 새벽 찬 기운을 느낄 촉감이 있어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다. 몽골의 맑은 밤하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과 은하수를 보지 못했어도, 나를 닮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도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