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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May 20. 2024

파렴치한 유괴범의 사랑

넌 자유의 몸이 아니야

*커버 이미지의 고양이는 저희 고양이 사진이 아니에요~



안다. 그것이 똥발이라는 것을. 단백질 가득한 사료를 먹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맛동산 모양 똥을 모락모락 싸고 열심히 모래를 헤쳐 덮은 발이다. 다 아는데 그렇게 깨끗하고(실제로 그루밍을 해서 깨끗하다!) 귀여워 보일 수 없다. 고 작은 발을 잡아 젤리 장난감 만지듯 조몰락거리고 입 맞춘다. 

 

안다. 내가 유괴범이라는 것을. 엄마 고양이 옆에서 태평하게 뒹굴뒹굴하던 작은 생명체 둘을 데려와 뻔뻔하게 이제부터 내가 엄마라고 세뇌했다. 둔감한 후추는 하루 만에 새집에 적응했지만 예민한 치즈는 밤새 울어 재꼈었다.

 

안다.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양이의 귀는 32개의 작은 근육들로 이루어져 180도로 회전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개보다도 청각이 좋다. 그러나 내가 애타게 불러도 10번 중 9번은 귀만 까딱여 가볍게 흘려버린다.

 

 

옛날 옛적, 아이돌그룹 2PM은 ‘10점 만점에 10점’이라는 곡으로 데뷔했다. 거기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뒷모습이 너무 사람을 괴롭게 해 / 착한 나를 자꾸 나쁜 맘을 먹게 해’ 자신의 음심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고 탓하는 전형적인 성폭력 가해자의 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매일 그런 파렴치한이다“학, 이건 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야.”, “엄마는, 엄마는!! 참을 수가 없구나!” 시도 때도 없이 고양이들을 덮쳐 번쩍 안아 들고 둥기둥기 한다. 싫은 티를 낼 때도 있어서 되도록 참으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정말 쉽지 않다.


동그란 눈, ’ㅅ‘자 모양의 입, 쫑긋한 귀, 개성 있는 털 무늬, 몸체의 아름다운 곡선과 부드러운 털, 감정대로 움직이는 털 뭉치 꼬리. 후추와 치즈가 바동거려도 끌어안고 뽀뽀를 퍼붓는 걸 멈출 수 없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귀를 물고 옴뇸뇸뇸 씹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물럭거리며 말랑한 살결을 느끼는 것도 모자라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있을 땐 살짝 엉덩이 털을 양쪽으로 걷어 똥꼬까지 구경한다. 건강을 점검하는 척도라는 핑계를 대며.

 

 

이렇게 언제라도 찰싹찰싹 붙어있고 싶은데, 불행히도 여름이 오고 있다. 아무리 실내 온도를 봄가을과 비슷하게 25~26도에 맞춰 에어컨을 가동해도 북슬북슬한 털코트를 입은 후추와 치즈에게는 가혹한 계절이다. 여름에는 허리를 낮춰 기이할 정도로 꿀렁거리며 사람의 손길을 피하고, 장난감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도 금방 지쳐 드러눕는다.

 

아! 지난가을, 겨울, 봄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창가에 누워 햇볕을 쬐는 치즈는 털 한 올 한 올이 후광을 받아 빛났고 몸에선 내내 향기로운 마른 햇볕 냄새가 났다. 후추는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내 품으로 뛰어올랐다. 저항할 수 없이 후추와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솜사탕이 되어 파스텔 색조의 하늘로 녹아내리는 그런 잠. 서늘하거나 추운 날에는 쉽게 손길을 허락하는 그들을 아주 많이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행복의 수치가 한 칸씩 한 칸씩 올라갔다. 남편이 물었다. “그간 고양이 없이 어떻게 살았어?”

 


후추와 치즈는 전적으로 내 욕심에 우리 집으로 왔다. 동네를 산책하는 반려견도 나를 보고 짖고, 길고양이도 나를 피해 후다닥 도망가는 세계에서 나를 사랑해 줄 고양이가 필요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들에게 뻔뻔하게 나를 엄마라고 세뇌했다) 소원대로 후추와 치즈는 나를 사랑해 주었다. 나는 그들 세계의 전부가 되었고.

 

그렇다고 나를 전적으로 따라주는 건 아니다. 넘치는 격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들을 덥석 끌어안을 때 그들은 야생마처럼 뒷발로 나를 걷어차 품을 훌쩍 뛰어넘어 나간다. 갑작스러운 포옹이 무척이나 불쾌했는지 잔뜩 성이 나 스크래처 기둥에 마구 발톱을 갈고 캣휠을 우다다다 달린다. 언제부턴가 간식을 내밀어도 뛰어오지 않고 내가 허리 굽혀 바쳐야만 드신다. “아기 고양이~ 우리 아기고양이~”하고 매번 불렀더니 정말 자신들이 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잘 먹길래 한 번에 왕창 주문한 주식캔을 어느 날 갑자기 거부하기 시작한다. 내 돈! 자신의 생활루틴에 맞춰 생활해주지 않으면 뒤에서 원망의 사이렌을 울린다. 이전 집 천 소파와 커튼에는 발톱을 박아 당겨 보풀을 잔뜩 만들다 못해 빵꾸를 내놓았다. 

 


동시에 후추와 치즈는 참 쉽다. 단 세 번만 쓰다듬으면 이내 목을 울리며 골골 소리를 낸다. 조용한 거실에서 그 골골거림을 들으며 누워있노라면 그렇게 영원히 살 것만 같다. 영원히, 무궁히, 끝없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내가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후추가, 설거지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냉장고 앞에서 똘망한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치즈가 항상 거기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고양이 집사들이 그렇듯 나도 후추와 치즈를 대학에 보내는 게 꿈이다. 인간이 대학에 갈 나이인 20살만큼 시간이 지나면 고양이는 인간 나이 100살에 가까워진다. 이번 달에 후추와 치즈의 8번째 생일이 있다. 고양이 노년의 시작은 만 7살부터다. 믿을 수가 없다. 요리 봐도 조리 봐도 아기 고양인데 말이다. 

 

예전에 교무실 뒷자리에 앉은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은 아기 고양이예요.”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은 내가 키운 고양이예요.’ 뭘 하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기심으로 겹겹이 싸여있던 나의 세계가 조금 느슨하게 열린다. 사랑이 깃들며. 



후추야, 치즈야. 오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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