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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Aug 01. 2021

K를 병원에 데려간 날

외국에서 병원에 간다는 것

  임용된 교과와는 달리 본의 아니게 2년째 다문화 학생을 위한 한국어학급 담임을 맡고 있다. 한국어학급 담임을 맡게 되면 '교사가 이런 것도 챙겨줘야 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부쩍 많아진다. 이 날도 역시나 그런 생각을 했던 날이었다.



  6월 중순쯤 화요일, 점심에 K가 급식을 두 번 먹고는 배가 아프다며 5교시 내내 앉았다가 엎드렸다가를 반복했다. 점심을 두 번 먹었다는 말에 먹은 직후 뛰어놀다가 으레 체했겠거니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고 K는 배를 움켜쥐면서도 농담을 하면 웃기도 하고 대답도 곧잘 했다. 나는 그리 심각하지 않게 "으이구, 많이 먹어서 순간 체했나 보네~ 잘~했어! 그래도 많이 먹었다니 다행이야. 배 많이 고팠구나? 많이 아파?"와 같은 말을 아이에게 툭툭 건네며 꾸역꾸역 수업을 진행했다.


  다음 날, 아이는 연락도 없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고객님의 사정으로 착신이 정지되었다는 안내문이 흘러나왔다. 살짝 걱정이 되어 어머님과 아버님께 전화를 드려봤지만, 항상 그러셨듯 일하시느라 바빠 연락이 닿지 않았다. 오후에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K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으며, 전화도 되지 않는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여쭤봤더니 아버님은 내게 되물으셨다. "K가 학교에 안 갔어요?"


  순간 어찌 답해야 할지 머뭇했다. 나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도록 침착하게 또박또박 "네, K가 학교에 안 왔습니다. 지금 K 전화 안 돼요. 어머님도 전화 안 돼요. 아버님이 K와 전화할 수 있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수화기 너머로 바쁜 아버님의 난색이 전해져 왔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지금 없는 것을.  K와 통화가 되면 저에게 다시 전화해달라고 부탁드린 후 전화를 기다렸다. 몇 분 후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K가 배가 너무 아파서 학교에 가지 않았으며 전화를 못 한 이유는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셨다. 짐작했던 이유와 정보가 무심히 들려오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전화기는 왜 안 되는 것인지 여쭤보았는데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오늘 밤에 고치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아버님은 바삐 전화를 끊으셨다. '확실히 한국 부모님과는 정서가 다른가보다, 학부모님께 확인받았으니 됐지 뭐..'


  비가 추적추적 오던 목요일, 아이는 학교에 왔다. 하루 만에 학교에 온 걸 보니 금세 괜찮아졌나 보다 싶었다. 1교시는 강사님 수업 시간이었다. 엎드려있는 K에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고 교무실에 내려왔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강사님께서 내려오셨다. "선생님, K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요."


  교실로 올라가자 화요일에 봤던 모습보다 더 괴로워 보이는 K가 배를 움켜쥔 채 엎드려있었다. 아이가 증상을 표현하는 데에 서툴다 보니 아이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했다. 화요일보다 많이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세게 아픈지, 계속 아픈지, 어제도 아팠는지, 병원에는 갔는지.

  체했을 때 누르면 아프다는 부분을 꼬옥 눌러보았더니 아이가 아파하기에 우선 보건실에 데려갔다. 보건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증상을 듣고 체했을 때 먹는 약을 주셨다. 약을 먹었으니 조금 기다려보자, 괜찮아질 거야 하던 찰나, 아이가 토할 것 같다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에게 물어보니 어제도 몇 번 토했다고 한다. 심지어 물을 먹고도 토했다고 하니, 병원에 안 가고 뭐했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부모님께는 아프다고 말씀드려봤냐 물어봤더니 말씀드렸단다. 그런데 그냥 별말씀 없이 참아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화요일에 내가 그랬듯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 아이의 상태를 알려드리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돕고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아이가 나지막하게 "엄마랑 아빠 일해서 바빠요. 전화 안 돼요. 아마도 점심시간에만 전화할 수 있어요.", "병원 학교 마치고 갈 거예요."라고 했다. 학교 마칠 때까지 버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고개는 끄덕였지만 여전히 배를 움켜쥔 채 괴로워했고, 몇 차례 화장실로 뛰어가기도 했다.


  조퇴를 시키자니 집에는 초등학생 여동생 밖에 없고, 코로나로 보건실에 하루 종일 누워있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수업을 할 수 있는 상태는 더더욱 아닌데 부모님은 오시기는커녕 통화도 안 된다. 눈앞의 아이는 너무 괴로워 보인다. 난처해하고 있으니 강사님께서 "병원에 데려가 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하셨다.


  사실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내 몫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모처럼 오전 수업이 없던 요일이었던지라 밀린 할 일들을 좀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날이기도 했다. 게다가 바깥에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고.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그저 부모님이 극적으로 전화를 받으시기를 바라면서 몇 차례 전화를 해보았지만, 기대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강사님께서 "선생님 바쁘시면 제가 대신 다녀올까요?"라고 하시는데, 강사님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갔으면 내가 가는 게 맞지, 나 편하자고 강사님께 그 수고로움을 넘길 만큼의 뻔뻔함도 없었다. 개인으로서의 나와 교사로서의 내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마음을 굳혔고, K에게 병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자면 '울며 겨자 먹기'가 적절하겠다. 처음에 K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건지 미안했던 건지 나랑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음을 굳힌 나는 K를 설득했고 K는 몇 분간 거부하다가 괴로움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결국 나와 함께 학교를 나섰다.



  60대를 대상으로 코로나 백신 접종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학교와 가장 가까운 작은 내과에 갔더니 대기자가 많았다. 온 시간보다 대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좀 더 멀리 있는 내과를 찾아 조금만 더 가보자고 아이를 달랬다. 아파서 걷기가 힘들다는 K를 데리고 겨우 도착한 병원은 웬걸, 대기자가 더 많았다.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이의 얼굴에 묻어난 감정을 보니 다시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하기가 미안했다. 다른 곳에 가도 상황이 별반 다를 것 없을 것 같기도 해서 일단 접수를 하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두 번째 '울며 겨자 먹기'였다.


  접수증에는 이름, 주민번호 기재란이 있었다. 나도 K도 외국인 등록번호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영어로 된 아이의 이름을 적은 접수증을 내밀며 외국인 학생인데, 외국인 등록번호를 모를 경우 어떻게 하면 될지 여쭤보았다. 접수 담당 직원은 당황해하며 동료 직원에게 외국인인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다들 당황하며 누구도 답을 모르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순간 내 가슴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냥 비워두라는 답과 함께 학생 국적이 외국이냐고 묻더니, 외국인이면 의료 보험 적용이 안 되어서 병원비가 많이 나올 거라는 안내를 해주었다. 가슴이 한 번 더 막혔다. 왠지 답답해지는 마음을 안고 K와 함께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배를 움켜잡고 웅크려 있는 K를 다독이면서 몇 분을 기다렸을까, 우리보다 먼저 온 분들은 대강 다 들어간 것 같은데 차례가 너무 안 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접수처에 가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앞에 9팀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황당하면서 순간 화가 났다. 병원에 왔을 때 있던 대기자가 9~10팀 정도였던 것 같은데 앞에 9팀이 더 있다니. 평소 내 권리는커녕 부당한 일을 당해도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 나는 무슨 용기였는지 조곤조곤 황당함을 내비쳤다. 바로 다음 차례로 진료받게 해 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환자 접수를 할 때 백신 접종이 우선순위라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의아하고 황당했지만 다음 차례에 들어가게 해 준다니 감정을 가라앉히고 감사 인사를 했다.


  내가 같이 왔기에 다행이지, 아이가 부모님이랑 왔으면 어땠을까, K의 부모님은 한국어 소통이 서투신 데다가 외국의 병원에서 상황을 알아보고 따지는 것이 누구에게든 결코 쉽지 않을 텐데, 계속 한없이 기다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무지근해졌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진료실에 따라 들어갔다. 아이는 자신이 언제부터 아팠는지, 증상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배가 아프다고 했다. 설사를 했냐는 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설사가 뭔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 외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천천히, 쉽게, 하다못해 영어를 곁들여라도 말씀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국인 학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듯했다. 진료실 침대에 누워 의사 선생님께서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시고는 질문을 하셨고, 나는 그것을 쉬운 단어로 바꾸어 말해주었다. 살이 별로 없는 K의 체형이 그날따라 눈에 띄었다.


  25,000원의 병원비를 대신 내고 약을 받으러 약국에 갔다. 약사 선생님께서 복용법을 설명해주시는 걸 대신 듣고 아이에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며칠 전에 마침 약 복용법과 관련해서 식전, 식후 등의 단어를 배운 뒤였다. K가 금방 이해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의 뿌듯함과 함께 무거웠던 마음이 풀어짐을 느꼈다. 아이와 학교로 복귀하니 담임 선생님이 협조를 구해놓아 주신 덕분에 아이를 보건실에 재울 수 있었다.



  병원 가는 것이 보통 일의 축에도 끼지 않았던 내 입장과는 달리, K에게는, 더 정확히는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채 외국 국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보통일이 아닐 수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와 같이 갔음에도 K에겐 그날 오전이 그리 쉬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한국어가 서툰 부모님이랑 갔다면 또는 혼자 갔다면 아이는 병원을 다녀오며 들은 말 중에 몇 퍼센트나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외국인과 외국어로 둘러싸인 병원이라니, 누구에게나 충분히 긴장되는 공간일 것이다. 병원에 앉아있는 내국인과는 달리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고,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는 뭐라고 말한 건지 계속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은근한 긴장감을 놓지 않고 있어야 할 테지.



  다음 날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한 모습으로 학교에 왔다. 친구들과 장난도 치고 까불거리길래 "야~ 너 안 아픈가 보다?"라며 넌지시 상태를 확인했더니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한다. 어제의 K는 며칠 아플 것처럼 보였는데 약 먹고 주사 맞았다고 이렇게 안 아플 수가 있나, 의아할 정도였다.


  병원에 가기 전 아이와 했던 대화가 문득 생각났다. K는 초등학생 때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땐 일주일 정도 학교에 못 가고 집에 누워있었더니 괜찮아졌다고 했다. 병원에 가지 않고 낫는 데에 일주일이나 걸렸다고 하기에 원인 불명의 특별한 증상인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병원에 못 간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병원이라는 공간도, 병원비도 그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일이기에 K의 학부모님의 무심함에 대한 오해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K를 병원에 데려간 것은 내가 해도 괜찮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운 건, 병원에 함께 다녀온 이후 K가 나를 더 가깝게 대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 또한 K뿐만 아니라 한국어학급 아이들과의 거리가 조금 좁혀진 기분이다. 한국어학급을 맡게 되면서 그래도 우리 학교 구성원 중 아이들의 입장을 잘 아는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난 나라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온전히 그들의 입장에 서기에는 아직 한참 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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