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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Aug 21. 2021

TOPIK(한국어 능력 시험)의 의미

너희들의 자랑이자, 우리의 목표이자,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다는 목소리

  7월 11일 일요일 오전 8시, 졸린 몸을 일으켜 7명의 아이들과 학교 근처 지하철 역에서 만났다.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 P대학교에 갔다. 한국어능력검정시험(TOPIK)Ⅰ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학교는 한국어학급이 별도로 있긴 하지만, 중학교에서 한국어는 정규 교과가 아니기에 한국어 능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없다. 물론 한국어학급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평가지를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전공자가 아닌지라 아무래도 체계적인 평가 문항을 구상하여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배운 내용을 제대로 아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직관적인 문제 또는 시중에 있는 문제집 등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은 체계적인 평가라고 하기엔 약간 아쉽다.

  

  그래서 가능하면 1년에 한 번씩, TOPIK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아이들의 한국어 능력을 객관적,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목표가 생긴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지원이다. 


  아이들을 2년간 만나보니, TOPIK 시험 급수는 실제로 아이들에게 꽤나 큰 목표가 되는 듯하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니 한국어에 대한 목표 의식도 딱히 없고, 시험이라면 더더욱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나라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열의도 딱히 안 생길 것 같은데 시험까지 쳐야 한다니. 으, 난 싫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이 생각보다 TOPIK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강하다. 단순히 나중에 시험 점수를 어딘가에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하나의 '달성하고픈 목표'가 되고, 높은 급수를 받으면 하나의 훈장처럼 여기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기특하다. 교내 정기 고사보다 더 애정을 갖고 준비하며 서로 점수를 비교하기도 하고 같은 급수여도 더 높은 점수를 받으면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좀 더 최선을 다해 가르쳐서 한 문제 더 맞히게 할 걸 싶어 살짝 미안해진다.



  시험에 응시하러 갔던 그날도, 일요일인 데다가 아침 일찍 만나야 해서 걱정이 많았다. 등교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으니 놀러 간다고 해도 늦을 것 같은데 시험을 치러 가는 거라면 지각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일찍 온 아이들도 있었고 지각할까 봐 가장 걱정되었던 L도 친구들과 딱 맞춰서 왔다. 신분증이 될 학생증도 다 챙겨서.


  아이들이 시험을 치는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시험이 종료되고 쏟아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온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시험에 대해 와글와글 이야기했다. "학생은 우리밖에 없었어요! 다 어른이었어요!", "내 앞에 베트남 사람 있었어요!", "러시아 사람 있어서 인사했어요!", "시험이 엄청 쉬웠어요!". 시험 치기 싫다고 내내 징징거렸던 L마저 시험 치다가 잠이 들어서 문제를 다 못 풀었다며 멋쩍은 듯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난히 화창했던 그날의 하늘과 아이들의 조잘거림이 잘 어울렸다.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성적이 언제 발표되는지 물어보았다. 드디어 성적 발표일인 8월 19일. 그런데 내가 워크숍 강의를 하느라 성적 발표 시간에 맞추어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얼굴에 아쉬움이 서려있는 아이들을 달래고 달래 다음 날인 20일 아침 일찍 확인하자고 하고 보냈다. 


  20일 아침, 아이들은 조례가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왔다. 한 명씩 차례차례 성적 확인을 했고, 1학년 아이들 모두 TOPIKⅠ에서의 최고 등급인 2급 합격이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너무 기뻐했고 환호했다. 그렇게 좋을까 싶을 만큼.


  사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어 소통을 어느 정도 잘하는 아이들이라 2급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르겠지. 자신들의 실력이 이미 2급을 뛰어넘은 지 오래되었음을. 환희에 차올라 상기된 아이들을 보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이들이 시끌시끌 환호하자 주변 선생님들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며 물어보셨다. 아이들의 합격 소식을 최대한 널리 알렸고, 흑백으로 뽑아주었던 시험 성적표를 컬러로 뽑아 코팅해서 다시 주었다. 아이들이 느낄 자랑스러움이 최대한 오래갈 수 있도록.


  조금 놀랐던 점은 한국어 수업을 할 때 세상 따분한 표정을 짓고 매일 같이 게임하자고 조르던 R이 가장 점수가 높았다는 점이다. 사실 점수가 가장 낮을 줄 알았다. 자신이 1등이라는 사실을 안 R의 상기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 별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주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쑥쑥 성장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



  일각에서는 다문화 아이들이 시험 치는 것까지 학교에서 지원해야 하냐고 반문하시기도 한다. 사실 나조차도 작년에는 그 반문에 명확하게 답변하기가 어려웠다. 으레 재작년부터 해왔으니까 당연히 예산에 응시료를 편성했고, 여태 응시해 온 시험이니 나 또한 그 시험을 함께 준비해주었다. 특히 작년에는 하필 시험 언저리에 코로나가 심해진 탓에 시험 응시를 미뤘으므로 TOPIK 시험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지 못했다.


  올해 아이들과 함께 TOPIK 시험장에 가고, 시험장의 분위기를 느끼며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경험하고, 결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아이들을 보니 알겠다. TOPIK 시험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한국의 공교육에 편입되어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잘 나오지 않는 시험 성적, 끝자리에 가까운 등수, 하루 종일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말들, 그리고 그런 말들로 채워진 수업 시간이다. 끝까지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아이들마저 언어라는 장벽 때문에 본인이 노력한 만큼 온전히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아이들의 자신감이 깎여 나가고 자존감마저 눌러 버림을 많이 느낀다. 그저 부모님을 따라서 한국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속상함이 한 층 더 밀려온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랑이자 목표가 되어줄 수 있는 TOPIK 시험이 고맙다. 어제 2급 성적표를 손에 쥔 아이들은 졸업 전에 최고 등급인 6급을 따겠다며 빛나는 눈으로 다음을 말했다. 1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되어주며 자신감을 좀 가져도 된다고, 나보다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말해줄 수 있는 TOPIK 시험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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