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칸의 일본정원과 혜일사(惠日寺)의 銅鐘
구글 지도에 찍힌 료칸까지는 걸어서 25분 거리다. 배가 고팠다. 우선 뭔가 먹어야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라쓰(唐津), 역시 거리가 깨끗했다. 멀리 가라쓰성이 보였다. 약간의 요기를 하고 가라쓰 성에 올랐다. 다행히 산 위까지는 엘리베이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산 위에서 성안으로 들어섰다. 일본성의 내부 모습을 기대했는데 성 원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외관만 원형을 보존하고 내부는 가라쓰성을 소개하는 홍보관이었다. 역시 일본은 문화재 활용에 적극적이라 생각했다. 천수각에 올랐다. 최고의 전망대다. 여기 보이는 이 바다가 현해탄이다. 현해탄 건너면 우리나라다.
가라쓰성에서 육지의 두 꼭짓점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리 건너에는 마을이 있고 마을 너머에는 해안선을 따라 소나무 숲이 보인다. 저 숲이 유명한 홍의 송림(虹의松原)이다. 가라쓰성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야 우리가 예약한 료칸이 나온다. 배낭을 메고 내 가방까지 끌고 가는 남편의 뒤를 따라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남편과 함께 걷는 이 길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구글 지도만으로 료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료칸이란 여관을 말한다. ‘료칸에 묵다’라고 하면 ‘일본의 전통 여관에서 묵다’라는 말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한옥에서 하루 잔다는 뜻이다. 이번 여행이 자동차 없이 기차로 하는 배낭여행이어서 우리 나이에 다소 무리였다. 신혼여행이나 효도여행 혹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휴식을 위해 며칠 편하게 쉬다 오겠다는 럭셔리한 해외여행과는 달리 배낭여행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과도한 비용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특히 남편은 숙박비용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한다. 딸의 요구도 그렇고 너무 짠내 나는 여행은 하지 말자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비즈니스호텔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호텔 비용의 3배에 달하는 료칸을 예약했다. 가라쓰 료칸에서의 하루는 그만큼 이번 여행에서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다카토리 저택에 가 보고 싶었다. 가라쓰성에서 15분 거리라고 하는데 저택은 일본의 석탄왕이라고 불리는 다카토리 고레요시(1850~1927)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다카토리 저택은 일본 근대 건축으로서 디자인이 뛰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후손들이 건물 보존을 위해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일본 문화청이 복원해 놓은 곳이라 한다. 저택은 호사스럽고 일본 상류사회의 생활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본 근대의 정서와 정신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다카토리 저택은 일본 근대 건축의 명작이라 평하고 있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 뚜벅이 여행의 한계다.
우리나라 종가에서 또는 유럽의 성에서 하룻밤 머물 수 있다면 여행객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요즘은 이러한 저택이 숙박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많다. 여행객은 그 지역의 고급문화를 체험할 수 있으니 좋고, 소유자는 수익을 올릴 수 있어서 좋은 일이다.
내가 머문 료칸은 학이 춤추는 모습이라는 가라쓰성과 400년 된 엄청난 규모의 방풍림 무지개 솔밭 사이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1800평 규모에 1890년대 말부터 지어져 1912년 완성되었다고 한다. 여러 동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건물 중앙에는 여염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건물 내부로 보나 정원으로 보나 일본 근대 상류사회의 생활문화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밖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료칸에 들어서니 규모가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체크인하고 방을 안내받았다. 건물은 여러 동이었고 건물 안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의 양옆으로 방들이 많았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할 후 방을 배정받았다. 우리 방은 2층에 위치했다.
나는 우선 정원을 둘러봤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료칸이 천팔백 평이라고 한다. 정원은 중앙에 넓게 자리하였고 건물 사이사이에도 정갈하게 조성되었다. 전통적인 임천식 정원이었고 나무 하나하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물이 흘렀고 한쪽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었다. 료칸 정원을 돌아보는데 안쪽 건물 앞에서 카운터에서 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5시 약속시간 전에 시간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살림집이었다. 할머니가 안쪽 방에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오며 회장님이라고 소개했다. 이 료칸의 주인부부였다. 회장님은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자신은 운영에서 은퇴하였고 89세라고 했다. 할머니는 80세라고 했고 한국어를 꽤 잘하셨다. 3년 이상 한국어 공부를 했는데 코로나 기간 많이 잊었는데 지금도 한국 드라마 보며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우리는 노부부와 약 30분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내가 정원에 관심이 많으며 강의도 한다고 소개했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교토에 있는 일본 전통정원을 보았다고 하니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울었다. 나는 '서방사'라고 했다. 한국정원과 일본정원의 차이점을 물었다. 나는 일본정원은 기교가 발달해 매우 아름답지만 한국정원은 단순해 보이는 모양에도 큰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지원도(方池圓島)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남편의 통역으로 내가 하는 말이 완벽하게 전달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되었다. 할머니는 혜일사(惠日寺)라는 절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소개했다. 우리가 돌아가기 전 꼭 방문할 것을 권했다.
저녁 내내 혜일사를 가는 방법을 알아봤다. 하지만 이야기만 듣고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위치를 안다 해도 택시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택시를 불러 타더라도 돌아올 때 다시 택시를 부르면 거기까지 와 줄까 하는 염려에 혜일사에 가기는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위해 카운터로 내려갔는데 료칸 주인 할머니가 벌써 나와 계셨다. 우리가 꼭 혜일사에 들려 정원을 볼 것을 권하며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고 택시를 부르도록 직원에게 부탁했다. 우리는 계획을 바꿔 혜일사에 가기로 했다.
택시가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택시는 처음이다. 혜일사까지는 약 20분, 虹의 松原 끝에 산 쪽으로 마을 안쪽에 위치했다. 일본에서 신사는 곳곳에 있지만 사찰은 드믈다. 사찰 문으로 들어서 우리나라 대웅전에 해당하는 커다란 법당으로 들어갔다. 문에서 법당까지는 양옆으로 자갈이 깔려 정갈했다. 정원은 법당 뒤쪽에 산 경사면에 접해 조성되었다. 정원에서 법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원 옆에는 우리나라 납골당에 해당하는 죽은 사람들을 모시는 공간이었다.
혜일사의 정원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연못이다. 자연스러운 물길, 삼단폭포, 연못은 물론 자연스럽게 놓인 언덕의 돌들은 우리나라 안압지가 원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연못 안의 섬은 우리나라 섬과는 달랐다. 수생식물을 심는 포트랄까 4~5개가 떠 있었다.
혜일사를 가서 정원을 보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에 종각이 있었는데 일본식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남편이 와보라는 손짓을 해서 문 오른쪽으로 가니 이곳에 朝鮮鐘이 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혜일사의 동종(朝鮮鐘)(국가지정중요문화재)“이 사원의 본당에 있는 동종, 현재 한국과 일본 합하여 51개가 있는데 조선 이전의 조선종의 하나이다. 소화 25년 8월 국가 중요문화재에 지정되었다. 높이는 73센티, 구경이 51.4센티, 전형적인 조선종이고, 폭이 5센티 높이가 14센티(?) 명좌에는 – 태평 6년 병인 9 월청부곡북사 중량은 121근 양승담왈 – 여기서 태평 6년은 중국의 요 왕조가 사용하였던 연호인데 고려에서는 현종 17년(1026년)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절 입구에도 정확하게 조선종이 있다는 표식이 있었다. 천안 천흥사 동종과 유사한 크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천흥사 동종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우리나라 동종으로 지금은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천흥사 동종을 직접 본 일이 있는데 크기가 자그마하고 너무나 예뻤다.
나는 본당으로 들어가 본당 안에 있다는 조선종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본당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 종은 일본종이었다. 국가 중요문화재이기 때문에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본당 안에는 지도자와 학생들과 행사는 주관하는 사람들이 뭔가 심각하게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라마다 공예품은 특색이 있다. 우리나라 동종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모양을 하는 우수한 예술품이다. 임진왜란 같은 전란 시에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 동종을 많이 가져갔다. 대동아 전쟁 때는 철을 녹여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바닷가와 닿아 있는 혜일사에 우리나라 동종이 있을 확률은 충분히 있다. 꼭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혜일사에 갈 기회가 있다면 사진이라도 찍어오길 바란다.
혜일사에서 나왔다. 가장 가까운 역이 홍의송원이라는 역이다. 터덜터덜 짐을 끌며 역에 와서 기차시간을 알아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기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