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화 규격화된 도시형 단독주택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적어도 부모세대 이전에 서울에 올라온 사람?
서울의 문화에 적응해 있어야 서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까지?
7~80년대 강남 개발 이후 강북의 사람들보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더 서울 사람 같은데....
분당 고양 일산으로 확산된 신도시의 사람들도 서울 사람이지 않을까?
수원 인천 남양주 여주 이천까지 전 수도권의 사람들도 서울사람이랑 문화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용산 아파트에 살 때다. 내가 6학년이었고 오빠는 중학생이었다. 오빠와 내가 기차를 타고 어딘가 다녀오던 길이었다. 우리는 용산역에서 내려야 했다. 얼마큼 더 가야 용산역인지 불안하게 밖을 보고 있는데 오빠가 한강을 건너야 서울이라고 했다. 용산에 사는 우리 가족은 분명 서울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서울에서 마쳤지만 지금도 내가 태어난 곳, 수원사람이라고 말한다.
아파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 외곽에 단독주택을 구입하셨다. 서울로 인구 유입이 활발했던 시기다. 서울의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서울 인구의 증가는 곧 주택 부족으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서울 주변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다. 서울은 점점 거대도시(metropolis)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 단지를 개발해서 계획적인 설계가 도입되었으며 건축재료도 규격화 표준화되었다. 국민주택이라 불리는 관 주도의 주택과 민간회사가 지은 민간 주도의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우리 집은 민간 주도의 주택이라 볼 수 있다. 호남비료 회사의 이름을 붙여 우리 동네의 이름은 호비주택이었다.
새로 이사 간 우리 동네는 모든 집의 모양과 크기가 같았다. 집의 위치를 알려줄 때 동네 이름과 **주택 몇째 골목 몇째 집이라고 말하면 된다. 마치 아파트 주소를 말할 때 몇 동 몇 호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골목의 모양은 직선이고 대문의 크기와 모양까지도 비슷했다. 계획되고 정비된 주택단지였다. 동네 이름도 주관해서 지은 민간회사의 이름이다.
집 내부는 안방 주방 화장실 건넌방이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위치해 있다. 이는 마치 한옥이 마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구성된 모습과 흡사하다. 한옥이 외부공간을 포함해서 지어졌다면 도시주택은 이러한 구성이 내부로 들어오고 대신에 현관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다. 대문을 들어오면 마당 공간은 있었으나 넓지 않았다. 담장 쪽으로 길게 화단을 만들어 계절감은 느낄 수 있었다. 마당 한쪽에 수도와 변소가 남아 있기도 했다.
도시의 인구집중 현상은 가족 구성원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직장을 위해 도시로 이주한 가족은 부부 중심의 가구로 변화되고 있었다. 빠르게 핵가족화되면서 주택의 공간 형태 또한 부부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다. 집의 규모가 작아지고 내부는 모든 공간이 평면이며 화장실이 내부로 들어온 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도시형 단독주택은 사회적 변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핵가족화되었기 때문에 도시형 단독주택이 지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도시형 단독주택으로 인해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지가 좁아 더 이상의 확장이 불가능하고 개량 기와나 박공지붕이기 때문에 위층을 증축하기도 어려운 형태다. 아버지가 장손이라 항상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으로 북적이던 우리 집도 이 시기 시골 친척이 올라와 머물렀던 기억이 거의 없다.
"삶이 집(공간)을 만들지만 집(공간)은 삶을 지배한다."
용산의 전통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아버지의 바람과 다르게 나는 서울의 다른 쪽 외곽에 있는 봉천동에 위치한 신설학교에 배정받았다. 집은 고척동인데 봉천동으로 통학했다. 돌아보면 우리 동네에도 중학교가 있는데 왜 그 먼 거리를 길에서 보냈나 하는 생각이다. 나는 오류동역에서 기차를 타서 노량진역에서 내렸다. 노량진에서 버스를 타고 장승백이를 지나 상도동을 지나 언덕을 넘었다. 학교는 봉천동 버스 종점에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곳이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서울 겨우시'라고 농담 삼아 말씀하셨다.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최근에 편입된 우리 동네는 겨우겨우 서울시가 되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이었다. 동네 주민은 꾸준히 많아졌다.
이 시기 집보다는 학교 가는 길이 더 기억에 남는다. 오류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노량진역까지 갔다. 기차에서 내리면 다시 버스를 탔다. 기차 통학은 너무 재미있었다. 기차를 타면 덜커덩덜커덩 진동이 너무 좋아 지구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버스는 항상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제복 입은 버스 안내양은 아이들을 싣고 싣고 또 실었다. 마지막에는 달리는 버스에 올라 힘겹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땅땅 두 번 문을 두드리면 버스는 출발했다.
중학교 3학년 광복절날 전철이 개통되었다. 8.15 기념식을 마치고 노량진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처음 운행되는 전철이 화환과 태극기를 꽂고 다고 오고 있었다. 전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철거덕 거리던 기차의 느낌은 사라지고 전철은 미끄러지듯 달렸다.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졌다고 신기해했다. 전철을 타보기 위해 지방에서도 올라왔다.
이 시기 시작된 먼 거리 통학은 대학교 졸업까지 계속되었다. 40년 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