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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쭈달 Nov 10. 2024


검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혁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덕에 혁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기묘할 만큼 새하얀 피부, 핏기없는 입술. 미간에서 이어져 있는 두 눈썹은 특이하게도 눈썹의 끝이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 참으로 괴기스러움을 풍겼다. 그가 쓴 갓 형태의 모자 앞에는 마치 극락을 연상케 하는 금색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혁수는 그를 보자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 자네가 혁수로군.     


좀전에 들었던 괭괭거리는 기계음이 혹시 이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당황한 혁수의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는 피식 실소를 자아냈다.


- 오늘 아이 하나가 와야 했는데 오질 않았다네. 자네가 살린 '그 아이' 말일세.    

 

마치 책망하듯 아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얘기하는 그였다. 혁수는 슬그머니 그의 표정을 살폈다가 간담이 서늘해졌다. 순식간이었지만 분명 남자의 찌푸린 미간 사이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왔기 때문.

혁수는 너무 놀라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아, 내 소개가 늦었네. 난 저승사자일세. 다들 날 '처사'라고 하더군.


아직도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혁수를 보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 내가 하는 일은 명부를 작성해서 망자를 데려오는 '사자'에게 전달하는 걸세. 사자는 '꼭두'에게 망자를 인도하고 꼭두는 염라대왕께 데리고 가지.

- 그, 그럼 제가 죽은 겁니까?

- 아닐세.

- 혹시 아까 말씀하신 그 아이 때문에..

- 그래, 그아이. 망자 명부에 적힌 그 아이가 안왔어.

- 하지만 아이는 너무 어렸습니다. 차라리 저 같은 놈이 죽으면 죽었지..     

- 그 아이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네. 그리고 염라대왕께서 극대노 하셨어. 명부 꼬이는 걸 아주 골치아파 하시는 분이라.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었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른 대가는 치루어야 한다. 비록 그게 내가 될지라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혁수가 물었다.


- 저는 벌을 받게 되는 걸까요?

- 흠.. 이게 벌이라면 벌일지도 모르겠군. 자네, 앞으로는 영혼이 보일걸세. 귀신말일세.

- 예? 영, 영혼이요?


두 눈이 휘둥그레진 혁수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처사였다.


- 너무 걱정 말게. 잡귀는 볼 일이 없네. 내가 생을 마감하는 망자들의 명부를 자네에게 전달하면 자네가 망자들을 택시에 태우고 꼭두에게 데려다 주면 되네.

그래, '사자'가 되는 거지.


- 제가 이 일을 꼭 해야만 합니까?

- 푸하하


처사는 떠나갈듯이 크게 웃었다. 우스운 얘길 한 것도 아닌데, 어리둥절한 혁수에게 처사는 말했다.


-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네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자네가 반드시 해야하는 일일세.


그래, 이건 벌이구나.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하는 벌.


- 자네가 참 운이 좋아. 마침 저승으로 안내하는 사자가 특진을 해서 그 자리가 딱 비어 있었다지.

우린 적임자를 찾고 있었고, 자네가 그 자리에 딱 적임자라 생각했지. 명부가 꼬인 명분도 있고 말야.

- 망자 정보는 어떻게 받습니까?

- 자네 휴대폰으로 망자 정보가 갈걸세. 요즘 저승도 최첨단이라고.     


남자는 농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기스런 외모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지었다.

혁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전혀 서질 않았지만 눈 앞에 있는 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남자는 검고 긴 소매끝손을 쑥 집어 넣더니 가방 하나를 꺼냈다.


- 망자들이 어느 문으로 가야할지 정해주는 '현'이 안에 들어 있네. 택시 앞에 두게.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혁수는 처사가 건네가방가슴팍에 안았다. 하지만 가방에선 시궁창 냄새인지 뭔지 모를 메케한 냄새가 나 오래 안고 있기 힘들었다.


- 아, 그 가방은 안 열어보는 게 좋을걸세. 꽤 성질 더러운 녀석이거든.


흠칫 놀란 혁수가 가방을 두 손으로 받쳐 모시는 시늉을 하자 처사는 킥킥댔다. 


- 앞으로 꽤 재밌어지겠어.


처사는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떠난 자리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혁수는 주저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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