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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12. 2020

2년 전에 끄적였던 낙서가 그림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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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적어온 습관 덕분에 늘 노트 부자로 살아왔다. 명상 노트, 필사 노트, 일기 등등 다양한 성격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자주 끄적였다. 그중 몇 년 전부터 아주 소중한 말과 글을 만날 때마다 써왔던 노트가 있다. 찰나를 포착해 글로 옮기거나 타인의 소중한 이야기가 귀에 담길 때마다 펜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그 노트에 끄적였던 작은 캐릭터가 나의 첫 그림책 주인공이 되었다.     


  첫 스케치 당시 주인공은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그때도 고양이와 책을 무진장 좋아했기 때문에 그 둘을 합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고양이가 앉아있고 그 고양이는 책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띠처럼 쓰고 있다. 왜 고양이는 머리에 책을 쓰게 됐을까?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증폭되자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로 오해받는 수사자로 주인공을 바꾸었다. 사자가 고양이로 불리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 사자에게 결핍을 주고 싶어졌다. 주인공은 갈기가 멋진 수사자가 아닌, 갈기가 없어서 소심한 사자였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고 소심해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을 때가 많다.’라는 설정이 생겼다. 그러다 우연히 멋진 주인공이 등장한 책을 보고 머리에 갈기로 만들어 쓰고 싶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책으로 그러면 안 되는 일이지만 사자는 책을 오려 머리에 쓰고, 없던 자신감을 얻는다. 자신감을 얻은 사자는 동물 친구들에게 나서서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읊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사자는 능변가였고, 친구들 사이에서 요즘 말로 핵인싸(인기가 아주 많은 인물)가 된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사자는 더는 갈기에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멋진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쓰고 있던 책을 벗어던지고 친구들 앞에 나서니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는 책 갈기가 유행되어 모두가 책갈기를 쓰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적어둔 뒤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미지가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느낌이 들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고 나서야 지역 기관에서 운영하는 그림책 강좌를 수강했다. 9개월 동안 진행되는 긴 호흡의 수업. 무료 수강이라는 큰 혜택까지 받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팀원을 만나 첨삭을 받게 되어 작위적인 부분을 고쳐나갔다. 멘토 작가님의 열성적인 강의가 더해져 그림책이 완성되었다. 글은 언니와 함께 다듬었고 그림은 전부 창작 그림이다. 내가 만든 그림책이라는 사실이 얼떨떨하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다. 노트에 끄적였던 낙서가 이야기되고 그림책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엔 해냈다.     


  이 그림책은 지역 기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만큼 여러 기관에서 좋은 마음으로 자유롭게 이용했으면 좋겠다. 그림책을 만든 덕분에 다른 기관 유튜브 채널에 낭독 영상을 업로드할 수도 있었다. 작은 낙서가 하나의 그림책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게 찾아온 우연한 아이디어가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준 것이다.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르인지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내가 만든 그림책도 부족한 부분투성이지만, 그림책을 만들어본 값진 경험을 준 소중한 존재다. 지금까지 만들어둔 그림책 스토리들이 세상 빛을 보려면 열심히 달려야 하는데, 많이 느슨하게 작업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당근은 그만 거두고 채찍을 준비해서 열심히 달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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