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친구야
초딩 5학년 때, 진국이와 내가 함께 사생대회에 나갔다. 어느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게 그 대회의 미션이었다. 같은 곳을 내려다보며 모두들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똑같은 마을을 보고 그린 그림들이 제각각 달랐다. 그때 처음 알았다. 같은 걸 본다 해도 같은 걸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림을 제출하면서 진국이 그림을 흘깃 봤다. 그런데 영 아니올시다였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건너편의 조그만 집 몇 채. 저게 뭐지? 진국이는 프로인데, 왜 저런 그림이... 그에 비해 내 그림은 마을 전체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믿었다. 내 어깨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며칠 뒤 수상작이 발표됐는데 진국이 그림이 대상이었다. 그것 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의아함? 신기함? 이런 것으로 인해 그림과 조금은 가까워졌겠다. 그렇게 세월이 점점 흐르면서 진국이 그림에 실린 원근감, 마을의 정서, 작가로서의 시선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초딩 그림을 두고 너무 심오하게 해석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진국이는 뭐랄까, 차원이 달랐다.
진국이는 수채화뿐만 아니라 만화 그림도, 아이들의 초상화나 캐리커쳐도, 정물화나 포스터도, 뭐든지 잘 그리는 아이였다.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고 예술적 가풍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잘 그렸다.
중학생이 되어 첫 음악수업을 받는 날이었다. 처음 만난 음악선생님이 물었다.
"이 반에 그림 잘 그리는 학생 있나? 음악실에 좋은 그림들을 붙여야 하는데..."
아이들이 즉각 대답했다.
"진국이요, 진국이..."
"아, 그래? 어떤 그림을 잘 그리나?"
아이들 몇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말 그림 같은 거 뎁따 잘 그려요."
선생님이 씩 웃으며 (약간 야비한 미소였다) 말했다.
"말 그림? 그런 건 그림이라고 할 수 없어."
진국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수채화도, 정물화도, 선생님이 원하는 그림이 어떤 것이든 다 그릴 수 있어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왜 그랬을까. 이 바보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다.
며칠 뒤 음악실에는 진국이 그림보다 훨 못난 몇 장의 풍경화가 걸렸다. 아이들 모두 '이게 뭐야, 이런 건 진국이 그림에 비하면...' 하고 불평했다. 진국이는 역시 말이 없었다. 얼굴만 붉힐 뿐. 너희들의 단순무식한 말 때문이잖아, 하고 나는 친구들을 원망했지만 사실은 내 질투심이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진국이에게 미안했고 쪽팔렸다.
1년에 한두번쯤은 불쑥 진국이가 떠오른다. 어딘가 여행을 하다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나타나면 꼭 그 친구가 떠오른다. 저걸 보면 진국이는 어떻게 그릴까,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추정하면서 제발, 그림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기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