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벌을 많이 받았다

죄와 벌을 헤아리며

by 포포

갑자기 내가 받은 벌의 종류를 헤아려본 적이 있다.

벌은 죄(또는 잘못)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듣고 배웠기 때문에, 아마도 벌의 종류를 헤아리기 시작한 것은 죄의식을 느꼈거나 죄에 관한 명상에 빠졌던 때인 듯 싶다.

벌의 종류와 갯수를 헤아리다 보니 '벌이 꼭 죄의 대가'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그렇다. 벌을 벌이라 하지 않고 얼차레(얼, 정신을 바로세우는 훈련이라나), 기합(氣를 불어넣어 준다나)이라고도 불렀으니까.


그런 것들을 종합해 떠오른 벌들.

손들기 또는 무릎꿇고 손들기, 그냥 무릎꿇기, 책상 위에서 무릎꿇기, 앞으로 나란히 자세, 차렷자세로 서있기, 눈감고 서있기 등등은 나름대로 귀여운 벌들. 죄 또는 잘못의 경중에 따라 강도와 종류가 차이가 난다 할 수 있지만, 딱히 그런 것들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그저 벌 주는 사람(일종의 갑이랄까)의 취향과 그날의 감정선에 따라 갈렸던 듯하다.


그 다음에는 맞는 벌이 있었다. 손바닥(희귀하지만 손등을 때리는 이도 있었고 발바닥 때리는 이도 있었다), 허벅지(뒤쪽이 아닌 앞쪽 허벅지를 때리는 이도 있었다), 엎드려 뻗친 자세에서의 허벅지(이른바 빳다라 불렀다), 머리(꿀밤), 따귀(뺨과 같은 곳인데 어감이 많이 다르다), 머리 박고 빳다 정도가 떠오른다. 아, 맞기 중의 최악은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는 벌이었다. 가령 두 사람이 싸웠는데 잘잘못에 대한 판단은 아예 앖이 서로를 더 때리게 해 원수를 만드는 벌이었다.


원산폭격(머리박고 뒷짐을 지는데 그 장소가 다양했다. 흙, 자갈, 시멘트바닥... 중에서 미끌미끌한 마룻바닥이 최악이었다), 한강철교(엎드려 뻗친 상태에서 뒷사람의 목 양쪽에 발을 올려 여럿이 계속 이어지면 철교처럼 인간다리가 된다) 같은 벌들은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의 전유물(별게 다 전유물이다)로 보인다.


내가 받은 그 수많은 벌들 중에 최악은 '뺑뺑이'라 불리는 선착순 벌이었다. 달리기에 젬병인 탓도 있지만 선착순을 할 때마다 가장 친한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는 것이 울컥울컥 생채기를 냈다. 돌리고 또 돌리는 그 벌이 체력단련이라는 미명하에 치러지기도 했다. 다른 벌들과 달리 그것은 학년이 오르고 올라도 반복해서 받아야 했고 더러는 진화하기까지 했다. 군대에서는 더욱 자주 변형돼 (이를테면 맨몸이 아닌 총들고, 군장메고, 다리에 뭘 채우고 등등) 나를, 우리를 괴롭혔다. 아우, 생각만 해도...


내 친구 재만이는 선착순의 귀재였다. 그닥 힘들이지 않고 1, 2등을 해 일찌감치 열외로 빠지곤 했다. 그래서 물었었다. "넌 어쩌면 선착순을 그리 잘하냐?" 귀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처음부터 기를 쓰고 달리냐. 처음엔 대충 달려. 선착순은 한번에 끝나지 않으니까 두번째 바퀴부터는 중간이 막 엉키거든? 반환점까지 가지 말고 중간에 휙...."

한편으로는 허탈했고, 한편으로는 쾌감이 일었다. 그 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평등한 경쟁에서 진 게 아니라는 위안이었지 싶다. 졌지만 진 게 아니다? 그야말로 젠장이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기에 그토록 많은 벌을 받았을까.

애써 다른 벌들도 찾아 보니 없지는 않았다. 청소하기, 외우기, 반복해서 쓰기, 반성문이나 독후감 쓰기 같은 양질의 벌들도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눈 감고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라"는 벌도 주었다(주로 졸았지만).

그나저나 그토록 재빨랐던 재만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뭔가를 배달하며 산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전히 씩씩 빠르게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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