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일반부 동상 - 박영미
5월 생명력이 넘치는 연초록 물결이 넘실거리네요. 부릉부릉, 아침부터 고모의 16년 애마, 오토바이는 생명력 넘치는 엔진 소리를 뿜어내네요. 고모, 그거 아세요? 김제 시내 수많은 오토바이 중 저는 고모의 오토바이를 소리만 듣고 알아낼 수 있다는 걸요. 그 오토바이 소리를 들은 지도 언 16년이 흘렀네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고모는 우리 남매를 키우셨지요. 그때 제 나이 열일곱, 고모 나이 서른다섯이었어요. 한창 사춘기이고 먹성 좋은 중, 고등학생 둘을 카운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까요. 지금 제가 고모 나이 (33세)쯤 되어보니 '나라면 조카 둘을 키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어요. 전 못했을 그 일을 고모는 해내셨네요.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는데, 고모는 그 머리 검은 짐승을 두 명씩이나 거두시고, 참으로 잘 키우셨어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 자체부터 잘 키우셨다는 입증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편지를 쓰면서 너무나 감격스럽고 행복한 제 모습 또한 잘 키우셨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고모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조카들 정말 잘 키우셨습니다. 고모랑 처음 같이 살던 날, 고모가 했던 말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고모가 작게나마 식당이라도 한 게 너희들 밥은 굶기겠냐. 숟가락, 젓가락 두 짝씩만 놓으면 된 게 우리 잘 먹고 잘 살아보자." 정작 고모도 자식 둘을 홀로 키우며 식당에 딸린 작은 방에서 생활했는데, 어떻게 우리 남매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나요? 그건 우리 남매가 불쌍하고, 또 안쓰러워 그랬겠지요.
일찍이 엄마라는 사람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계모를 만났지요. 그 계모는 신데렐라 속 계모보다 더 악랄했어요. 9년간 학대 속에 살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셨고 우리 남매는 세상 속에 버려지게 되었지요. 저는 그때 매일매일을 이대로 자서 영영 깨지 않길 기도했어요. 그런 우리에게 구원의 동아줄처럼 고모가 나타났지요. 고모가 같이 살자고 손잡아 주셨어요. 그때 고모가 우리를 안 키워주셨다면 우린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요? 세상을 원망하며 사람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왠지 그럴 것 같아 상상하기도 끔찍하네요.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는 사춘기 시절, 고모는 제에게 부모 그 이상이 되어주셨어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알 같은 제 마음속에 찾아와 주셔서 항상 어루만져 주셨어요. 그리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시는 모습으로 보여주셨지요. 우리를 키우고 나서부터 고모는 식당 앞에 포장마차를 설치하시고 호떡도 파셨어요. 아마 식구가 두 명이 더 늘었으니 돈을 더 벌고자 그러셨겠지요. 그런 고모 옷에는 항상 기름 절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어요. 파스 냄새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자식들 먹는 게 제일 좋다며 고모는 또 음식을 하셨지요. 아무리 피곤해도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에서 요리하시는 모습은 제겐 너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별명이 '뼈다귀'였던 제가 살이 찌기 시작한 건 분명 고모를 만나고부터지요. 고모는 앙상한 제 뼈에 살을 붙여 주셨고, 빈곤한 제 영혼에 행복을 불어넣어 주신 진정한 어버이세요.
무엇보다 계모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를 말끔히 지워주신 게 바로 고모였어요. 언젠가 집에 늦게 들어온 제게 실망하셨던 고모가 화를 내셨지요. 그때 겁먹은 제가 말했어요. "고모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너무 놀란 고모는 제 앞에서 펑펑 우시며 "절대 때리지 않겠다. 누구든 네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며 학대로 생긴 정신적 아픔까지 어루만져 주셨어요. 그런 고모의 포용 덕분에 저는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어요.
이뿐일까요. 매사 주눅 들어 있고 소심한 제 성격 역시 고모와 살면서 많이 바뀌게 됐어요. 동네에서 여자 대장부로 통했던 고모는 적극적이시고, 화통하셨어요. 그런 고모 곁에서 생활하다 보니 저 역시 고모를 닮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됐지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언감생심 대학에 가게 됐고, 그곳에서 대학신문사의 문을 두드리게 됐지요. 고모와 살기 전이었다면 '나 까짓게 어떻게 기자를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겠지만, 고모와 살고부터는 '한번 해볼까'라는 도전의식과 용기, 적극성들이 제 영혼을 채웠어요. 고모의 응원에 힘입어 저는 지역신문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됐고, 그 누구보다 당찬 여성이 돼 지역사회 곳곳에 제 이름 석자를 당당히 드러내며 따뜻한 휴먼 기사를 쓰는 기자가 됐지요. 이 모든 게 '고모' 덕분이고 '고모'가 있음으로 가능했던 인생역전이었어요. 고모, 저의 우울했던 청소년 시절을 아름답게 꾸며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제 고모의 노후를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맛 나게 꾸며드리고 싶어요. 어버이보다 위대한 고모, 진심으로 사랑해요.
2016. 5. 12
영미가
2016 대한민국 편지쓰기 공모전 수상작
대학일반부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