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51화 / 5장 전투 수도원
장편소설 빛의 여정 51화 / 5장 전투 수도원
"성 아나트라와 피데라시스의 병사들은 구름처럼 몰려든 적군을 대치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적군의 수에 기가 눌려 진영 내의 사기가 떨어 진 것을 파악한 그녀는 근처의 병사에게 잉크를 가져오라 말했다. 병사가 잉크를 가져오자 그 자리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 바닥에 놓고는 피데라시스의 기호를 그려넣었다. 그 후 본인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에 찢은 천을 걸고 군기처럼 휘날렸다. 아나트라가 치맛자락으로 만든 깃발을 휘날리며 가장 선봉에서 혈혈단신으로 달려가자 피데라시스들도 급히 따라 나섰다. 그녀의 대담함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적군은 순간적인 돌격으로 충격을 받아 전의를 상실했고 그 수가 많음에도 도망치기 바빴다. 심지어 너무 급박하여 자기 아군의 발에 치어 죽는 자들도 속출했다. 많은 이들이 승리를 거머 쥔 그녀를 바라보며 실로 신의 은총을 받은 자라 여겼다." -선지자의 증언 중 발췌-
깨어난 로이딘은 자신의 주문도 동시에 깨어남을 느꼈다. 그는 기뻐하면서도 후련한 감정도 들었고 두려움의 감정 마저 들었다. 자신이 꿈 속에서 본 괴물 그리고 빛의 주문은 실로 감내하기엔 버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깨어난 시각은 이른 아침. 책상에 엎드려 잤던 밤이 훌쩍 지나 버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런은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매일 마주했던 연습시간을 이틀에 한 번으로 조정했다. 그는 스스로 다 잡으란 이야기지 연습을 게을리 하란 이야기는 아니다라며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의 빈 시간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수도사 몇 명에게 할애했다. 열정적인 그의 모습은 몇 달 전의 헤르논의 황금 치유교단의 하급 사제의 힘 없던 일상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수도원 내의 베일런은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했고 일정이 항상 가득 찼다. 한 가지 문제점은 그가 로이딘 일행을 마주하기 전에 황금 치유교단에 피데라를 버리고 입교한 사실에 대해 용서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했단 점이며 그 노력이 그의 열정적인 모습의 일부에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변절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 있었고, 모두가 드리는 저녁예배 때의 그가 회개의 기도를 모두 앞에 드리며 형제자매들의 자비를 구했다. 수도원장 얀자가 그를 토닥이며 일단락 되기는 했으나 변절자 혹은 배신자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했다. 냉소적으로 대하는 사제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베일런은 그것을 자신의 멍에라 생각하며 수도원 일정에 전념했다. 어찌되었건 로이딘 일행을 데리고 온 것은 베일런이며 그가 헤르논에서 잠시 신앙을 버리고 목숨을 유지한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에 두번째 선지자를 구출해 낸 것이다라는 극소수간의 공유되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베일런을 도리어 용감한 자, 혹은 진정한 피데라시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래서 얀자는 돌아온 베일런이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대지 말라며 오히려 수도사들을 연습시키는 "엑셀리 마스터"라는 요직에 앉혔다. 이 자리는 신입 수도사들을 자주 만나고 접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중에 교단의 중추가 되면 저절로 스승인 사제도 덩달아 받들어 지기 때문이었다. 훈련 및 연습 담당 사제 "엑셀리 마스터"를 농담삼아 "수도원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부르기도 했다.
로이딘 일행은 수도원 내의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과 같았기에 사정을 잘 아는 베일런에게 크게 의지해야만 했다. 친해진 수도사들은 자기들이 수도사들이 아닌 순례자로 생각한다며 너무 친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란 말도 해주었다. 어디까지나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닌 "조각을 찾아서"란 목적이 있었기기에 곧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조각을 찾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헤르논을 거쳐 수도원에 도착한 로이딘은 3달 가까이가 되서야 주문을 일깨웠다. 그는 마침내 연습장의 베일런 앞에서 땅에서 솟구치는 빛 기둥들을 보여주었다. 그 광경을 본 베일런이 넋이 나갔고 눈부신 광채에 압도되어 실로 그가 선지자가 될 재목임을 점차 확신했다. 수도원장 얀자도 운이 좋게도 로이딘의 첫 주문을 보게 되었고 2층 테라스에서 내려와 소름이 돋았다며 크게 칭찬했다. 그런데 궁금증도 같이 돋았는 지 로이딘에게 물었다.
"헌데 왜 하늘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걸까? 땅에서 솟구치는 빛이라..."
로이딘이 말하기도 전에 깨달은 얀자는 선지자의 예언 중 글귀가 떠올라 급히 말했다.
"설마..때가 차매 빛이 솟아나리라?"
베일런도 암묵적으로 추측만 하고 있었으나 얀자가 말하니 예언의 일부가 나타남을 알게 되었다. 베일런이 말했다.
"원장님, 로이딘이 오늘 연습장에 오자마자 너무나 놀라운 게 꿈 속에서 울로메히를 처치했다고 하며 주문을 독려 하신 게 다름아닌 피데라님이라 했습니다."
"울로메히는 아나트라의 상대 아니였던 가? 그것을 꿈으로 로이딘이 재현해보게 하신 걸까?"
얀자는 입을 가렸다. 눈치껏 베일런이 입을 같이 가렸고, 로이딘도 가렸다. 기도의 행위를 올린 얀자가 연습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흥분을 감추 질 못했다.
"이런 마법을 비교적 빨리 가르치신 게... 그만큼 예언의 실현이 당겨진 게 아닐까 싶네만"
베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본 로이딘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 데 이걸 빠르다고 하다니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베일런이 로이딘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무지하게 고생해서 해냈다 생각하겠지만, 첫 날 네가 페이지를 폈을 때 두번째 선지자의 재목이라고 했던 칭찬을 기억하지? 그건 그만큼 네가 이 길을 가는 데 오래 걸리고 힘들 것이란 이야기를 달리 말한 거야"
로이딘이 가만히 듣다가 베일런과 얀자를 향해 본인이 궁금한 것을 해소하려 했다.
"도대체 그럼 선지자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지팡이 들고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인가요?"
얀자가 답해주었다.
"로이딘, 실망할 수 있네만 두번째 선지자는 첫번째 아나트라, 두번째가 너임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로이딘이 동공이 커졌다. 마음 속으로는 내심 기대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첫째와 둘째는 본래는 특정 인물을 지목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닌... 좀 복잡하긴 한 데, 아나트라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그녀가 실제로 그런 기적을 이루어내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니 첫째는 아나트라라고 말하는 것이고, 둘째 선지자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야. 결과론적으로 네가 그에 맞는 업적을 이룬다면 두번째 선지자라 모두가 부르게 될 거야. 즉 이 모든 것은 아직 예언의 시작이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는 말이네. 선지자란 단순히 영웅이나 군주 그 이상으로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자라네. 평화의 기수이기도 하고."
성 아나트라는 결코 여왕이 된 적이 없었지만 전쟁의 피바람에서 피데라시스를 살려낸 수도원장이자 여행하는 순례자였다. 그녀는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피데라시스들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서 승리한 사령관이기도 했다. 그녀가 일으켰던 전쟁은 아니였지만 이미 일어난 대륙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자락을 길게 찢어 피데라시스의 문장을 잉크로 그린 후 지팡이에 달아 흩날리는 군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군기를 부여 잡은 채 몇 천명이 싸우는 전장에 혈혈 단신으로 선봉에 섰다. 이러한 대담성은 인간의 마음으론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용맹함을 신의 은총이라 여겼다. 아나트라는 살아있는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수많은 아나트라의 행적을 설명한 선지자의 증언에서 일부에 불과한 설명이었다. 대륙의 피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만든 전투 수도원의 특수성으로 대부분 전쟁과 전투 부분을 많이 거론하기 때문에 수도원장과 베일런의 이야기도 선지자를 그렇게 설명하는 데에 익숙했던 것이다. 또한 이 자리에서 신학적인 부분과 그녀의 역사를 일일히 나열 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땅에 솟구친 빛 줄기 혹은 기둥들이 울로메히를 관통하여 사라지게 했고 피데라의 음성이 들렸다는 점이다. 베일런은 짧게 다시 압축해서 설명해주었는 데, 선지자란 아군에겐 희망을 적에겐 증오의 의지를 꺾게하는 자라 일러주었다.
주문의 광경을 본 얀자가 연습장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생각이 정리되었는 지 다시 말했다.
"그렇다고 로이딘, 시테온, 루네를 문전박대하며 "이제 조각을 찾으러 떠나거라!" 말 하기에 때가 된 것일까?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여전히 불안정한 주문 실력이고 또한 이들은 주문만 훈련되었지, 육체적인 전투 훈련은 아직 소화되지 않았잖나?"
베일런이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절반 온 것이죠. 만일 정말 때가 찼는 데 저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피데라께서 다시 한번 나타나 주시지 않을까요?"
얀자는 그 말을 다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서도 다르게 행동한다? 이것만큼 신에게 저항하는 불경한 자들이 어디있겠는가?"
얀자가 생각하는 딜레마에 베일런도 곰곰히 생각해야만 했다. 로이딘이 동굴에서 주문을 시전 후에 목소리가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란 말을 했으니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감탄사 인 것일까? 로이딘은 뭔가 답답한 마음에 그냥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 때가 찼다고 지금 당장이겠습니까? 잘 모르지만 저는 피데라님이 그리 속 좁은 신이 아니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뵜을 때도 그러하지 아니하셨구요"
실제로 신을 대면한 자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얀자와 베일런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불경하다고 외치는 속 좁은 피데라를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습을 마치고 얼마 후 식사시간이었고 로이딘 일행 셋은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었다. 아직 시테온과 루네는 로이딘의 주문 발현을 모르고 있었다. 로이딘은 지금 타이밍은 괜히 말했다가 깜짝 놀라 일어서기라도 한다면 소문이 동네방네 다 퍼질거란 두려움에 함구하고 저녁 예배가 끝날 때까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모두 해산할 무렵, 루네와 시테온과 걸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저기 있잖아? 너희들처럼 나도 주문이 나타났어"
그 소릴 듣고 역시나 눈치 없는 시테온이 펄쩍뛰며 소리치며 좋아했다.
"와! 진짜야? 대박인데 어떻게 나오..."
로이딘은 급히 입을 막았고 옆에 있던 루네도 기뻐하고 있었다.
"축하해 로이딘. 고생 꽤나 했을 텐데 빛을 정말 발한 모양이구나."
루네가 말하자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물론 뒤에서 시테온의 입을 틀어 막고 있으면서.
진정이 된 시테온을 풀어주자 그는 이제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나오든? 빛들이 쏟아져? 베일런 이마를 막 비추던가?"
거꾸로 된 빛을 신기해야 할 까? 로이딘은 주문의 현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게.. 하늘의 빛이 아니라 땅의 빛이야. 땅에서 솟구쳐 나오더라고"
시테온이 찡그리며 의아해 했다.
"아니 예비 선지자라는 양반의 빛이 땅에서 나온다고? 원래 피데라는 하늘에 있는 신이잖아. 그러면 하늘에서 막 떨어져야 하는 거 아냐?"
시테온의 말에 갑자기 로이딘의 머릿 속에 깨달음 하나가 번뜩였다. 땅에서 솟구친 빛이라... 피데라는 하늘의 왕좌에서 패배하여 추락해 이 땅을 배회하고 있는 빛의 신이다. 즉, 지금의 피데라는 하늘에서의 권능이 아니라 땅에서의 권능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52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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