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리뷰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1. 세상은 이상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이해하기 힘들고, 나 하나의 분노가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나한테 어떤 상처를 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 허를 찔리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믿기 어려운 기이한 세상을 살아간다. 단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지 않을 뿐.
2. <벌새>는 개봉 전부터 유명한 영화였다. 숱한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독립 영화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4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면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 벌새가 이 정도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필시 여성 서사에 대한 뿌리 깊은 갈증이었을 것이다. 여성이 영화의 주연 혹은 감독을 맡는 작품이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 또한 젠더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단순히 여성 캐릭터의 분량을 늘릴 뿐 정작 그에 걸맞은 스토리를 부여하지 못하는 작품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다행히도 그러한 걱정은 <벌새>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1994년 대치동에 사는 '은희(박지후)'는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하루를 사는 중학생이다. 은희의 일상을 카메라는 다소 긴 호흡으로 관찰하듯 비춘다. 그래서일까. 오빠 '대훈(손상연)'의 폭력, 엄마(이승연)와 아빠(정인기)와의 소통 문제, 친구 '지숙(박서윤)'과의 관계로 둘러싸인 일상을 은희는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 아래에서 그저 감내하듯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인생에 희망과 변화를 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영지(김새벽)'이다. 영지는 은희 마음속에 보이지 않게 남은 폭력의 상처들을 따뜻이 보듬어주고 세계에 대한 은희의 의구심에 조심스레 답을 해준다. 본인도 모르게 커져 존재를 드러낸 혹을 떼듯이.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일방향적인 사제 관계인 것도 아니다. 영지 또한 은희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중 은희와 영지는 나이와 경험에 상관없이 전 인간적 관계로 함께하는 인물들이다. <미쓰백>에서 상아(한지민)와 지은(김시아)이 끝내 모녀관계로 이어지면서 미완의 진보를 이뤄낸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받는 이들 간의 관계 안에서 그저 살아가던 한 아이는 어떻게든 더 잘 살아보겠다며 세계를 이해하려고 열심히 날갯짓하는 벌새로 다시 태어난다.
3. <벌새>를 두고 재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러닝타임도 길고, 영화가 길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영화의 호흡이 느린 것이 그 원인일 거다. 카메라가 한 번 자리를 잡고 인물을 비추었을 때 그 한 쇼트가 길다. 구도도 많이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멈춘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간혹 등장하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소리와 함께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전개의 원동력을 제공하지만, <벌새>만의 특징은 아니다.
흐름이 느려 멈춘 듯 느껴지는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의 세밀한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렇게 은희를 때리면서도 성수대교 붕괴사고 직후 누나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오열하는 오빠.
혹을 떼는 수술을 하면 흉터가 남을 은희를 바라보며 우는 아빠.
은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조금씩 은희를 바라보는 엄마.
병원에 입원한 은희를 만나 말을 건네는 영지.
영지와의 만남 이후 여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 은희.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여태 희생해 온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죄책감과 민망함, 과거와 달리 조금씩 서로를 보듬어 주는 모녀의 사랑, 혼란하기만 하던 세계를 거부할 줄도 알고,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도 있는 용기. <벌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은희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그러나 차분히 표현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재밌다고는 못해도, 잘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4. <벌새>는 영화 내내 정치와 관련된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저 1994년이라는 그 해에 벌어진 일들이 뉴스의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김일성의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 사건까지. 성수대교 붕괴도 그 여파가 은희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어떻게 미쳤는지만 보일 뿐, 사고와 책임자들에 대한 논평은 찾아볼 수 없다. 젠더 이슈와 관련해서도, 입시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은희와 지숙은 각자의 오빠가 때리는 것을 견딜 뿐이라고, 저 새끼가 죄책감에 우는 모습을 유령이 되어서라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자기네 생각은 해줄지도 궁금해한다. 학교 선생은 서울대에 가야 한다며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을 억누른다. 이 모든 것을 <벌새>는 그저 제시한다.
하지만 <벌새>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영화라서 오히려 가슴 깊이 정치적인 영화로 다가온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사는 것은 은희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질까. 어떻게 그 큰 배가 넘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했는지. 김일성이 어떻게 죽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 손자 밑에서 북한은 여전히 대포를 쏘고 지뢰도 설치하고 미사일과 핵을 만들고 있다. 가족 안의 폭력은 끊이지 않고, 남녀 간의 젠더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숱한 변화를 거친 입시제도에 대해 모두가 불만을 갖고 있지만 또 결국엔 그 안에 맞춰 살아간다.
2세대 페미니스트인 케이트 밀레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지 여성주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와 닿는 의제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인 선택을 할 테니까. <벌새>의 경우, 영화 속 은희의 세계는 너무나도 개인적이다. 하지만 은희의 세계만큼 우리의 세계도 이상하기 때문에 그녀의 일상은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공통된 감정, 곧 보편성은 모든 정치적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벌새>는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사소하기에 그 어느 영화보다 정치적인 작품이다.
5. 영화는 은희의 일상을 논리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녀의 세계도,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라서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조각조각 부분으로 보이는 그녀의 일상은 이제 더 이상 은희만의 것이 아니다. 나도 그러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벌새>를 보면서 가족을 떠올렸다. 주변의 사람들이 떠올랐고, 두 눈으로 그리고 뉴스로 지켜본 우리네 세상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세계를 알고 싶어 하고, 하나의 벌새가 되어 영화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