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을 선택할 때도 그렇지만, 직업을 선택할 때는 더 어려워진다.
나는 어쩌다 " VMD(비주얼머천다이저)" 라는 직업을 선택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4학년 (당시에는 국민학교), 내 성적표에 "글쓰기가 뛰어나 훗날 작가의 꿈을 이룰 제자를 기대합니다" 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유독 다른 아이들이 어려워했던 글짓기와 독후감을 잘 썼다. 빨간 선이 그려져 있는 원고지에 연필로 내 생각을 쓱쓱 적으면, 대부분 상을 받았다. 부산시 교육청에 가서 상을 받아 오기도 했고, '어린이 문예'라는 어린이 잡지에도 글이 자주 실렸다. 고등학교 때는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당첨이 되어 선물을 받기도 하고, 친구들의 사연 편지를 적어 주기도 했다. 군대 간 오빠들에게 편지를 적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하고, 글씨를 이쁘게 잘 쓴다는 칭찬도 많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중학교 때까지 배운 것 같다. 그 당시에도 각종 콩쿨 참가, 담임 선생님 결혼식 반주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 합창대회에서 '사냥꾼의 합창' 반주로 2등 상을 받은 후, 더 이상 피아노를 친 기억은 없지만, 늘 찬송가 반주에 대한 미련이 있다. 굳이 진도를 체크하자면 체르니 40번, 베토벤의 '비창' 정도에서 피아노는 마무리 한 것 같다. 한가지를 7년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했으니 피아노에서 손 놓은지 35년이 넘은 지금도 나는 피아노가 좋다. 그 땐 그랬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끝까지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직업이든, 뭐든,,,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의 언니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 놀러 오라고 했다. 우연히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본인이 운영하는 학원에 와서 그림을 배우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준비물은 4B 연필과 지우개, 스케치북, 학원비는 3만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피아노 학원과 비교했을 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집에서는 역시 단칼에 반대하셨다. 아그라파와 비너스 등 멋진 조각들과 이젤이 즉 늘어서 있고, TV에서나 보던 파레트와 각종 미술 도구들,,, 도화지 위로 사각사각 거리는 연필 소리도 너무 좋았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미술학원 방문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한 달이라도 다녀봤으면 어땠을까?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문과와 이과로 2개의 학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2학년 반편성이 이루어졌다. 수십 번의 고민 끝에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내가 다니던 여고에는 전체 12개 반 중에서 이과는 4개 반이었다. 암기할 것들로 꽉 차서 토할 것 같은 과목들을 2학년이 되어 더 많이 하고 싶지 않았다. 달달달 외우는 과목들이 내겐 너무 힘들었다. 입시와 함께 대학과 전공을 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대학이야 점수대로 가면 되었지만, 전공이란 그렇지 않다. 한 번 정해진 전공으로 평생(?) 직장(또는 직업)이 정해지는 줄 알았던 때라 신중해야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부모님 또한 다양한 정보가 없던터라 선생님과 의논하여 적당히(?) 맞췄다.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전공이 시작되었다. 2학점인데 4시간 수업, 3학점인데 4시간 수업은 기본이었다. 빽빽한 시간표, 과제 또한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과' 공부하다가 의류학과 졸업하면, '패션 디자이너' 당연히 되는 줄 알았나 보다. 패션드로잉, 패턴 드래핑, 공예장식,,, 매일 짐을 한보따리씩 들고, 미대도 아닌데 화구박스와 스케치북, 지통, 패션잡지와 교재를 양손에 들고 학교에 갔다. 집에도 공업용 미싱을 하나 들여서 쉬지 않고 돌려댔다. 디자인을 하고, 스커트를 배우면 과제 하나, 내 거 하나, 엄마거 하나씩은 기본이었다. 팬츠를 배우면 과제 하나, 긴바지, 반바지, 숏팬츠, 내 거, 엄마 거, 친한 친구 거,,,, 계절 바뀔 때마다 또 하나씩,,, 만들었다. 원피스도 긴 거, 짧은 거, 민소매, 반팔,,,등 3학년이 되니 한복도 디자인하고 만들고, 드레스도 만들었다. 방이 봉제 공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차고 넘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게는 창조성 넘치는 '디자인' 이라는 것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그런 디자인을하는 사람으로 평생 직업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럼, 난 무엇을 해야 하지? 누구 하나 붙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많은 고민을 하며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수업과 과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당시의 삶에 충실하게 지내고 있었다.
디자인의 시작은, 영감을 위해 이미지맵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당시에는 잡지를 오리거나 찢어서 만들어야 했기에 스케일이나 컬러를 지금의 컴퓨터에서처럼 조절하면서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모아서 하나의 일관된 맵을 만드는 것이 참 어려웠다. 이미지맵 하나에 모든 라이프스타일이 다 녹아 있어야 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들을 조합하는 코디네이션이 너무 재미있었다. 남들이 필요 없다고 버린 사진도 내가 잘 배치해서 이곳저곳에 사용하기도 했다. 각자 맵을 만들면서 좀 봐달라는 친구들도 생겼다. 그 밖에 작업을 하면서 과제, 또는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도 전체적인 배치와 구도를 잡아 나가는 작업이 재미있었다.
나는 디자인을 하는 것보다
배치를 잘 해서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
더 적성에 맞구나!
불현듯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큰 보물이라도 캐낸 듯 내 미래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