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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들 때

아이에겐 온 세상인 무쇠 엄마도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by 이지



아이 앞에서는 언제나 웃으며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고 사랑이 넘치는 엄마. 하지만 회사에서, 내부고객인 직장동료들과 외부고객 앞에서는 아닐 때가 더 많다.


하루는 업무 처리를 하다가 나의 실수(업무 내용 숙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와 부족함으로 인해 고객님이 여러 번 우리 지점을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현재 있는 지점은 규모가 작은 곳이라 딱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선배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도 바쁘다는 본사에 전화를 하며 업무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약속 시간에 고객님이 내방하셨고, 본사 담당자 선배가 알려준 대로 나는 업무처리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Enter키를 누르는 순간 '돼라, 돼라!!'라고 빌었다.


결과는? 실행 불가. 또 처리가 되지 않았다. 이 일로 고객님이 내방한 것만 벌써 3번째. 이제 더 이상 한 번만 더 오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다급하게 본사 담당자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지금 고객님 오셔서 처리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잘 안 되어서요. 혹시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잠시만요. 지금 보니까 제대로 처리가 안된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을 처리했다고 하시는 거죠?"

"네..? 아니 그때 선배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셔서 그 방법대로 똑같이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제가요? 제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아니, 분명히 그때 이 방법대로 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업무 처리 방법 숙지도 제대로 못하고 처리하고 계신 담당자님 실수 아닌가요?"

"선배님, 제가 선배님이 잘못 알려주셨다고 탓하는 게 아니고요..."


고객님 앞에서 얼굴 붉히며 전화 통화를 하다가, '업무 처리 방법도 숙지 못한 바보'로 만드는 선배의 그 한마디에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손님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는데 내 안에 '트리거'를 당기는 선배의 말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고, 결론은 끅끅대며 울기와 본사에서 업무 처리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객님은 당연히 당황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담당자가 울어버리니 아무래도 당황스럽고 어이없으셨을 수도. 나 또한 당황해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리고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를 않는다. 결과적으로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1시간가량을 일도 못하고 끅끅 울었다는 것.


'내가 왜 그때 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울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고, 아이도 야무지게 잘 키운다는 소리 듣고, 책도 많이 보고, 일도 똑 부러지게 한다는 소리 들으면서 나름대로 잘 지내왔는데 그 선배가 나를 '무지렁이'로 취급하는 그 말 한마디에 나의 만리장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다음 손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화를 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 죽겠으니 채무를 탕감해 주던, 대출을 해주던 해결 방안을 내놓으라는 건데, 지원 대상이 안 되는 분이었다. '안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왜 안 되냐', '그럼 되는 조건은 뭐냐' 따지기 시작하시는 손님. 오늘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겨우겨우 설명하고 납득시켜 보내드린다.


조금만 쉬었다가,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일하는 건 어때?


지점장님의 따뜻한 한 마디가 나를 살렸다. 숨 한 번 고르고, 아이스커피 한 모금 마시고.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마음 가다듬고 다시 나의 일로 돌아가본다.


퇴근 후 하원해서 집에 온 아이를 바라보면서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잠들기 전까지 그 아이의 온 세상이 되어준다. '엄마는 네가 아프지 않고 이렇게 웃어준다면 엄마의 속상함 따위는 잊어버릴 수 있어!'라고 마음속으로 얘기해 본다. 아이도 언젠가는 '우리 엄마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엄마도 누군가에게 깨지고, 상처받고, 울고, 화나고 그렇단다. 그렇지만 우리 아기만 있으면 엄마는 다시 무쇠가 되어서 다 이겨낼 수 있어. 다 잊어버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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