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먹는 아침인데 일시정지 됐다.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쁜 건가. 미각이 부추긴 시각인가. 오늘따라 유독 당근이 맛있어서 가만히 살펴 보았다.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동안 미각에 시각 자리가 없었다. 아니 시계가 빼앗았을 수도. 매일 입 속에서 경쟁하는 비트는 어떠한가. 소고기 마블링인 척 앉아 있네. 오늘따라 씁쓸한 게 역시 세상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토마토. 생긴 것마저 두근대는 심장 같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알알이 터질 듯한 기세다.
제철 과일이랍시고 반짝 들러리 선 참외와 천도복숭아. 참외는 얼기설기 얽힌 속이 안쓰럽게 생겼다. 내 접시에 있지만 엄마 입으로 향한다. 치킨 목을 가장 좋아한다는 식으로 엄마에게 내가 싫어하는 과일이라 했다. 엄마는 임신 때부터 가장 먹고 싶던 게 참외였다. 칠십 평생 일편단심이다. 복숭아 대행자로 천도복숭아가 아침마다 출근했다. 이래뵈도 심지는 굳다며 보란듯이 굵고 단단한 씨를 드러낸다. 참외, 복숭아보다 맛은 덜 하지만 임시직 아닌 정규직으로 취업한 브로콜리. 매일 아침 접시에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 같다. 어려서부터 가장 좋아하던 노랑색. 삶은 달걀은 존재 만으로 예술이다.
사진에는 없지만 매일 밤 아들 접시에 사는 아이들도 있다. 다름 아닌 오렌지와 자두. 알알이 터지는 오렌지를 깔 때 내 마음도 터질 듯 행복하다. 빨갱이처럼 드세 보이지만 누르스름한 순진한 자두 속을 들여다 볼 때 설렌다(굿나잇 인사는 "엄마 자두 돼?"다. 키위의 단면을 보고 건축물 하나 뚝딱 만들어 낸 아들의 단면도 보인다.
회사를 나갈 수 없게 되는 날이 다가올수록 참 많이도 들었다. 상사와 직원, 지인들에게. "이기적으로 한 번 살아보라"고. 내가 내 속을 들여다 보면 이기적이기 그지 없는데. 과일 껍질을 드리운 채 살았던 걸까. 지금으로선 당근처럼 살고 싶다. 나무 나이테처럼 겉과 속이 같은 단단한 당근. 비트처럼 나만의 결도 드리우고 싶다.
어느 누구는 내게 그랬다. "기질이 어디 가느냐. 조직에서 강점으로 키우라"고. 이러든 저러든 인생의 한 단면 단면에서 내가 괜찮으면 모두 괜찮다. 접시 속 모든 단면을 내 속에 담았다. 다면적인 사람이 되려나. 속으로 담는 꽁한 인간이 되려나. 오늘의 단면을 또 채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