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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sidio Library Aug 27. 2023

가을은 호박이 아니고 밤인데

문질러 닦으면 빤질빤질 하고 광이나는 예쁜 밤.



"Of course, Halloween alreday. It’s still August!” (벌써 할로윈 타령이야? 아직 8월이라고)


남편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오늘 가게에 갔는데 벌써 온통 호박과 유령데코 투성이. 할로윈은 10월 말인데 벌써부터 가을데코 판매로 요란하다. 어린이집에서 일 할 때도 그랬다. 가을이 되면 벌써부터 원장이 마트에 가서 호박을 한가득 사다가 원에 여기저기 배치해서 데코하곤 했다. 주먹만한 작은 크기는 창틀이 놓으면 예쁘고 축구공 보다 더 큰 것은 입구에 두곤 했다. 아이들이 와아앙 달려와서 "펌킨! 펌킨!" 하면서 만져보고 두드리고 좋아하면, 어른들은, "그래, 가을이지 곧" 했다. 호박이 색깔, 크기, 모양이 전부 다양해서 데코해놓으면 예쁘긴 하다. 주황, 하양, 노랑, 녹색 알록달록. 곧 마트마다 호박이 잔뜩 쌓이고 집집마다 호박으로 문 앞에 장식을 해 둘테지. 



잠 자기 전 브런치를 돌아다니다가 한결 작가님의 풋밤에 대한 에세이를 읽었는데, 퍼뜩 생각이 들었다. 


잠깐, 가을이면 호박이 아니고 밤인데




꼬마였을 무렵에, 아빠는 나무에서 밤 따는 법을 알려주었다. 덜 익은 밤은 푸릇푸릇 연한 초록색이고, 잘 익은 밤은 말 그대로 밤색. 바닥에 뾰족뾰족 여기저기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걸을 때 조심해야 했다. 아빠는 멀리 떨어지라고 얘기해 준 다음 능숙하게 밤 나무를 털었다. 작대기가 있으면 작대기로, 없으면 없는대로 참 신기하게 아빠가 나무를 털면 밤이 후투투툭 떨어져 낙엽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면 아빠는 자, 여 봐바 하면서 양 발로 밤 껍질을 조근조근 밟아뜯어 열었다. 갈색으로 잘 익은 밤들이 두개, 세 개, 옹기종기 모습을 들어내면 나는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아빠를 따라 떨어진 밤송이를 열어보려고 발을 갖다 대보았지만, 왜 내 신발은 밤송이가 그렇게 쉽게 뚫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내 밤송이는 고무로 만들었나 아무리 발로 잡고 비틀어봐도 열리지 않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안 된다고 뾰로퉁해 있으면 아빠가 다가와 아주 쉽게 열어서 뽀얀 밤송이를 꺼냈다. 


밤송이는 옷에 문질러 닦으면 빤질빤질 하고 광이 나서 아주 예뻤다. 사실 밤이라는 것이, 아주 예쁘고 오독오독 맛난 속알을 가졌지만 열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다섯 살 짜리 꼬마는, 그저 예쁘고 반짝반짝한 밤알 몇 개를 소중히 손에 들고 "엄마한테 쪄 달라고 해야지" 하면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게 다였다. 그러면 아빠는 그 밤알 하나를 가져가서 이빨로 어찌어찌 겉 껍질을 까낸 다음, 속 껍질까지 뜯어서 "너 이거 먹을 줄 알어?" 하고 나에게 주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보송보송한 속껍질. 나는 그것을 이로 긁어내 퉤퉤 해 가며 작고, 달콤하고, 아작아작 한 생율을 조금씩 깨물어 아껴가며 먹었다. 그 알밤은 왜 그리도 작은지. 아무리 아껴먹어도 금방 없어져 버렸다.  나는 작은 생밤을 자그마한 이로 깨물어 열어보려고 했지만 밤의 겉 껍질은 어찌나 두터운지. 여기저기 잇자국만 난 흠집투성이 밤을 이내 포기하고 아빠를 따라갔다.


엄마가 밤을 삶아주면 조금 식힌 다음에 두런 두런 밤을 까 먹었다. 엄마가 작은 티스푼을 주면  나는 밤의 중간을 이빨로 딱 깨물어 반으로 쪼갠 다음에 티스푼으로 야금야금 파 먹었다. 가끔 벌레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벌레를 먹는 일도 있었는데, 나는 벌레를 먹었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며 난리를 쳤지만 아빠는 좋은 단백질을 먹었다며 그저 웃으며 나를 놀릴 뿐이었다. 그 때는 그게 왜 그렇게 억울했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맞는 말 아닌가 싶다. 밤 먹은 벌레는 달고 맛있는 밤이었고, 잘 모르겠으나 밤 벌레 먹고 탈 난 적은 없으니.


누가누가 밤을 더 깨끗이 티스푼으로 퍼 먹었나 경쟁하고 있으면, 가끔 엄마나 아빠가 밤을 칼로 깨끗하게 까 내서 옛다 너 먹어라 하고 주곤했다. 아아, 나는 그게 너무나 좋았다. 뽀얗고 노란 동그란 삶은 밤알. 세상에 나는 그렇게 깔 수가 없는, 어른이 까 주어야 한입에 쏙 넣고 먹을 수 있는 포슬포슬 달콤한 삶은 밤알은 입에 들어가면 포스스 녹아서 없어졌다. 아, 까는 건 한참인데 먹는 건 왜 그리 빠른지. 까 놓은 삶은 밤만 계속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다시 티스푼과 이로 반 가르는 작업으로 돌아가곤 했다.





한참 깐 군밤이 그냥 마트에서 팔아서 그걸 많이 사먹었다. 안 까도 되고, 달콤하고 아니 세상에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다. 미국에 온 이후로 여기서도 가을에 한인마트에 가면 밤이 있긴 있다. 나는 이제 어른이라, 밤을 살 수도 있고, 삶을 수도 있고, 심지어 칼로 껍질을 깔 수도 있다. 근데 여기 밤이 맛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삶을 줄 모르는 것인지, 뭔가 맛이 없다. 내가 다 할 수 있는데, 뭔가 그 맛이 아니다. 엄마 아빠 옆에 찰싹 붙어서 깐 삶은 밤을 낼름 받아 먹던, 그 달콤한 맛이 안 난다. 그래서 밤을 사다 까먹는 건 포기했다. 일단 너무 많고, 남편은 안 먹고, 나도 뭔가 그 맛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마트 깐 군밤으로 돌아왔다.


아, 미국에 가을에 데코용으로 사용하는 호박은 가을 끝나면 어쩌냐고? 간단하다. 썩으니까 버린다. 아주 가끔, 어디 뉴스 같은 데에서 그 호박을 수거해다가 돼지농장에 갖다주거나 하는 자선을 하기도 하는 걸 봤다. 돼지들에게는 아주 맛난 특식이라 굉장히 좋아한단다. 그치만 대부분은 그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그냥 버린다. 데코용으로 키운 거라 아예 먹기 어려운 품종도 있다는 말도 있고. 아주 알록달록하고 화려하지만 그게 다라는 게 씁쓸하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밤이 더 좋다. 색이 화려하지도 않고 세상에 뾰족뾰족 가시에 단단한 껍질까지 있는 열매여도, 그 귀찮은 걸 열고, 찌고, 까야 하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못 한다. 다음에 한국에 가면 엄마한테 밤을 쪄 달라고 졸라야겠다. 그리고 내가 깔 수 있지만 아빠한테 까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옆에서 찰싹 붙어서 야금야금, 냠냠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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