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만들기는 맛있는 과일을 찾는 여정
매장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내 개인적인 취향의 반영이다. 사소한 소품이며 케이크의 맛까지 어느 하나 나의 취향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내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하고 존중해 주는 남편의 배려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취향존중이라는 명목 아래에 나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한다. 하하하)
많은 레시피에서 제누아즈 사이에 생크림과 함께 과일을 설탕에 조린 콩포트 등을 채우기도 하는데 난 그저 신선한 생크림과 전처리를 하지 않은 제철 과일이 들어간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가 판매 중인 케이크 사이에는 생크림과 제철 과일만 채워 넣기를 고집한다. 어떤 음식이든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원하는 맛을 완성하기 위해서 당도 높고 질 좋은 과일을 찾으려 노력했다. 대형 마트가 근처에 있다면 과일 구하는 일이 조금 더 쉬웠겠지만 근처엔 국산 농수산물만 취급하는 하나로마트가 주된 공급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일은 국산 제철과일을 사용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다양한 메뉴를 만들고 싶은 욕심에 좀 더 많은 과일을 찾아 대형마트가 있는 시내까지 다녔지만 육아를 함께하다 보니 너무 지치고 힘들어 원정 장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로서 특별히 과일이 먹고 싶거나 필요할 때만 종종 마트에 들르던 경험이 전부인 내게 매일 맛있는 과일 고르기는 복불복 뽑기나 다름없었다. 가족끼리만 먹는 경우라면 좀 맛이 없어도 ’ 에이.. 이거 별로네 ‘ 한마디면 됐지만 제품을 만들어야 하니 예민해졌다. 유심히 모양을 살펴도 향을 맡아봐도 알쏭달쏭했다. 분명 맛있을 거라 확신을 주는 비주얼인데 당도가 많이 떨어지는 과일을 마주할 때면 배신감마저 들었다. 사실 배신감 같은 건 두 번째이고 진짜 문제는 케이크에 사용할만한 과일이 없는 상황인데 불행히도 마트가 문 닫는 시간과 겹쳤을 때다. 보통 인근 마트의 문 닫는 시간은 9시 혹은 10시이다. 우리는 한창 제누아즈와 생크림과 씨름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과일을 손질하는 타이밍일 확률이 97% 이상인 때다. 대표적인 제철과일 중 케이크와 어울리는 것들을 사용 중인데 유독 애를 먹이는 과일이 바로 복숭아였다. 다른 과일들도 마찬가지지만 복숭아는 특히나 더 신경이 쓰여 일일이 먹어보는 품목이다. 재작년쯤엔 비가 많이 내려 당도 높은 복숭아 찾기가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반지 찾기 만큼이나 어려웠던 적이 있다. 아무리 빵과 생크림이 달콤함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한들 이렇게 아무런 향과 맛이 없는 복숭아까지 구제시켜주지는 못한다.
먹어보고 버리기를 반복했더니 3kg짜리 박스 중 겨우 한 두 개만 남았던 적도 있다. 다 버리고 나니 케이크에 사용할 과일이 모자라 부랴부랴 문 닫기 직전의 마트로 달려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산삼을 캐러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심마니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심마니도 이렇게나 시간에 쫓기지는 않을 테지.
고생 끝에 맛있는 복숭아를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날씨 영향으로 전체적인 농사가 어려워진 상황이라면 농사를 짓는 농부도, 유통업체도,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누구인들 고생의 결과물이 아쉽기를 바라겠는가. 이쯤 되면 남아있는 과일 중 좀 더 나은 것들을 골라 케이크를 만들 수밖에 없다. 온종일 제누아즈를 망친 후 울며 겨자 먹기로 괜찮은 빵들을 모으던 어느 날과 비슷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일을 구하는 경로가 다양해졌다. 알음알음 알게 된 농장에서 직거래를 하기도 하고 새로운 유통업체에서 납품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 거래처는 근처에 있는 세 군데의 마트들이다. 맛있는 과일을 고르는 일은 처음에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려운 일이다. 당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올해도 과일의 당도를 관장하는 신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비나이다를 외치게 하고 있다.
아래는 몇 날 며칠 늦은 새벽까지 야근을 반복하던 고단한 어느 날의 일기이다. 딸기를 구하러 밤늦게 시내까지 다녀온 날이었다.
2021.05.02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 어제도 열일하다가 밤 11시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낮에 사 온 딸기의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젠장. 남편과 함께 고민할 시간도 없이 12시까지 오픈하며 차로 30분 거리이고 제주도 코스트코라 불리는 제스코로 내달렸다. 곧 문 닫을 시간이라 부랴부랴 딸기와 아이 떡뻥과 오뚜기 쫄면을 집어 들고 나와서 가게로 돌아오니 밤 12시. 주차 후 피곤해도 정말 너무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차 안에서 의자를 젖히고 30분 단잠을 잤다. 안전벨트를 풀 힘도 없다. 새벽 4시가 넘는 시간까지 이어진 야야야근. 그리고 오늘 3시간도 채 못 자고 나왔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오늘의 야근을 시작하려는데 남편 눈이 반쯤 감겨있어 잠깐 자고 일어나라고 했더니 코 고는 소리가 저어기 집 앞 해변가까지 들리겠네.
피로 때문인지 주문 실수가 생긴다. 일정이 미뤄진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고 크기를 착각하기도 한다. 누락된 케이크가 생기기라도 하면 매장에서 판매하려고 만들어둔 케이크를 전달하기도 한다. 야근 시간이 길어지는 순간이다. 실수하지 말아야지하는 다짐도 너무 오래 누적된 피로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듯하다. 고단한 몸과 정신은 총명함을 앗아간다. 그래서 아예 여유분으로 한 두 개씩 더 만들기로 한다. 하루만 판매하는 원칙이라 안 팔리면 재고로 남을 텐데.. 남으면 내가 다 먹어야지 뭐.
쇼케이스가 텅텅 비어버린 마감시간에 커플이 찾아와 예약된 케이크를 찾으러 왔다고 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또 실수했나? 피로가 엉킨 한숨이 나온다. 알고 보니 다른 가게에 예약을 하고 우리한테 와서 여기 OO케이크 아니냐며 61 숫자 모양으로 만든 케이크를 내놓으란다. OO케이크는 맞는데 우리는 숫자 모양으로 케이크를 만들지 않는다. 이내 예약한 가게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커플은 민망해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이고 여기 우리 같은 손님이 있네. 부모님 환갑 케이크라고 많이 알아보다 헷갈리셨나 보다. 다 이해합니다.
뭐 암튼 요즘은 일하며 자막을 볼 필요 없는 한국 드라마를 보며 야근을 한다. 몰입도가 너무 강한 드라마는 주의력을 필요 이상으로 빼앗기도 하지만 덕분에 길고 적막한 밤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고 있다.
나까지 잠들면 우린 아침까지 쭉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장사를 망쳐버릴 것이 분명하므로 이렇게 횡설수설 중인데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니. 얼른 남편을 깨워 만들기 시작해야겠다.
#난아무생각이없다왜냐하면아무생각이없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