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詩]화요일에 보내드리는 나태주 시인과 나즘 히크메트의 시, 두 편
11월이 찾아왔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유난히 춥고 길었던 학창 시절의 겨울밤이 떠오릅니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이불을 덮어쓰고 엎드려서 시를 옮겨 적은 다음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어 책상 앞에 붙여 놓곤 했는데요.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버려 “학교 가야 하는데 안 자고 뭐 하느냐”라는 걱정을 듣기 일쑤였는데요. 왠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만큼은 엄마의 걱정도 겨울밤의 추위도 아랑곳 않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로 시작하는 시 <대추 한 알>를 쓴 장석주 시인은 신작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포레스트북스, 2024)에서,
“한 자 한 자 읽고 되뇔수록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며 번잡함은 고요함으로, 불안감은 평온함으로, 그리고 일상 속 멈춰 있던 감각과 생각이 새롭게 물들어가는 시간”이 시를 읽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아마도 시를 옮겨 적고 읊기를 반복했던 학창 시절의 겨울밤이 제게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은 11월,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에 결코 늦지 않은 달입니다. 화요일에 보내드리는 마지막 브런치 [책담詩]는 나태주 시인의 시 <십일월>과 나즘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을 보내드립니다.
십일월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풀꽃≫(지혜, 2014)에 수록된 시인데요.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달” 하지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달” 11월입니다. 그리고 계절이 주는 감성으로 “일상 속 멈춰 있던 감각과 생각을 새롭게 물들이기”에 가장 좋은 달입니다.
앚
다음은 장석주 시인의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에 들어있는 나즘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입니다.
진정한 여행
나즘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즘 히크메트는 튀르키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서정시인입니다. 정치적 이유로 국적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칠 때까지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다 간 시인인데요.
“나는 내가 드러나는 시를 쓰고 싶다.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영감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 그리고 사과 한 조각이나 경작할 수 있는 땅 한 평이라도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투르크학 인문 대사전, 오은경)라는 바람처럼,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통한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다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도 늦었다는 좌절도 아직은 이른 11월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진정한 여행>을 떠나는 <십일월> 보내시기 바라며, 화요일 브런치 [책담詩]의 마지막 회차를 마칩니다. 새로운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