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詩]화요일에 보내드리는 김옥희, 박종철, 김춘남, 윤천순 시인의 시
10월의 마지막 화요일 아침입니다.
먹구름 낀 하늘, 스산하게 부는 바람. 출근길에 마주한 늦가을의 정경에 풍선을 달아 놓은 듯 행복감이 내 마음속에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잠깐 마주하는 풍경만으로도 이렇듯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나는데요.
70년에 걸친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일흔 살에 자신의 꿈에 다가간 전국 성인 문해교실 일학년 시인들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를 쓴 박광춘 시인이 문해학교에 간 첫 날, 우산이 날아갈 만큼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신발까지 다 젖고 물이 줄줄 흘렀다고 합니다. 그래도 “꼭 일고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처음 가는 1학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하는데요.
10월 마지막 화요일 아침 브런치 [책담詩]는 7,000년 세월을 담은 100인의 인생 시가 담긴 ≪일흔 살 1학년≫(창비, 2022) 가운데 네 편의 시를 보내드립니다. 김옥희 시인의 <희망>, 박종철 시인의 <이제는 꿈을 먹는다>, 김춘남 시인의 <장하다, 우리 딸!>, 윤천순 시인의 <내 마음의 꽃밭>입니다. 소소하지만 묵직한 행복을 만나보세요.
희망
김옥희
다리가 불편한 장애에
글을 못 배운 절망까지 안고
세상과 멀어져만 살았다
학교 가는 날
힘겨운 다리로 오르는 삼 층 계단이
하늘같이 높아 보여도
오르는 걸음걸음이
열두 번 멈칫거려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 안고
교실 문을 들어선다
오십구 년 만에 학교도 처음
선생님도 처음 글도 처음
얼마 전 다녀온 소풍도 처음이다
공부하며 배운 것들 일기장에 담아
나를 키우느라 마음 아파했을
하늘나라 엄마에게 들려줘야지
이제는 희망뿐이다
오십구 년 만에 첫 등교를 하는 기쁜 날. 김옥희 시인은 힘들게 계단을 오르면서 장애로 인한 자신의 고통보다 평생 마음 아파했을 엄마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음고생하지 말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이제는 꿈을 먹는다
박종철
나는 열아홉에 엄마를 잃었고 일만 했다
힘이 나지 않아 약을 먹었다
다시 조금 힘을 내었다
나는 서른아홉에 아버지를 잃었고 손도 잃어버렸다
다 잃어버린 것 같아 약을 먹었다
나는 죽었다
꿈을 꾸는 듯했다
따뜻한 엄마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종철아."
나는 더 이상은 약을 먹지 않았다
다시 힘을 내서 견디고 견뎌 냈다
나는 마흔에서야 글을 알게 되었다
종이와 글을 먹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마흔다섯이다
나는 이제 꿈을 먹는다
대학에 가고 싶다
나는 종철이다
부모를 모두 잃고 죽을 것 같았던 날들,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살아갈 용기를 내어봅니다. 늦깎이 대학생을 꿈꾸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응원하는 두 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장하다 우리 딸!
김춘남
오늘은 문해학교 입학하는 날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우리 아들 입학식 때 손잡고 갔던 학교를
엄마도 없이 나 혼자 갔어요
장하다 우리 딸! 학교를 가다니
하늘나라 계신 엄마 오늘도 많이 울었을 건데
엄마! 울지 마세요
춘남이 공부 잘하겠습니다
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
서명도 못 하냐고 무시하던 택배 아저씨도
이름도 못 쓰냐고 눈 흘기던 은행 아가씨도
우리 엄마한테 혼났을 건데
언젠가 하늘나라 입학하는 날
내가 쓴 일기장 펴 놓고
동화책보다 재미있게 읽어 드릴게요
일흔이 넘어 첫 등교를 하는 딸은 오늘따라 하늘에 있는 엄마가 몹시 그립습니다. 아들 손잡고 입학식에 갔던 날처럼, 엄마 손을 잡고 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중에 엄마 앞에서 책을 읽어드릴 생각으로 즐거운 일흔 살 초등학생 김춘남 시인입니다.
내 마음의 꽃밭
윤천순
60년도 더 묵은 텃밭에 꽃씨를 뿌렸어요.
글자를 몰라 캄캄하고 답답했던
내 마음의 텃밭에 ㄱ, ㄴ, ㄷ, ㄹ 글 꽃씨를 뿌렸어요.
날마다 날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어느 순간 환하고 어여쁜 글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ㄱㄴ 심은 곳에 개나리꽃 노랑나비
ㄷㄹ 심은 곳에 달리아 라일락
ㅅㅈ 심은 곳에 사랑스러운 장미꽃
65년 까막눈 내 인생에
아름다운 글 꽃들이 봄꽃처럼
활짝 피어났어요
보람 있고 살맛 나네요.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운 분들이 쓴 시에서 우리 시가 가야 할 곳을 봤다." 시집을 내는 과정에 참여한 나태주 시인이 보내는 찬사입니다. ≪일흔 살 1학년≫에 수록된 100편의 시를 읽으면, 어르신들의 녹록치 않은 인생을 엿 볼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통해 나타나는 시인의 마음은 삶에 대한 사랑과 소박한 기쁨으로 넘쳐납니다.
삶을 바라보는 순수한 마음과 소박한 기쁨이 느껴지는 일흔 살 일학년 시인들의 시를 통해, 잠시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낭만을 꿈꾸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2024년 늦가을에 보내드리는 화요일 아침 브런치 [책담詩]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