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체 Sep 13. 2022

면구面灸스러움 : 미안하고 부끄러움

 - 눈여겨보는 알아보는 이

 '면구面灸스럽다'는 말은 얼굴에 뜸 뜨는 일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울 때 쓰는 말이네요. 면구의 '구'자가 '뜸구(灸)'자네요. '구울 구'라고도 하고요. 엊그제 추석날 잠깐의 빈 시간에 텃밭에 갔어요. 면구스러운 일이 생길지는 모르고 그저 흙 만지고 잡초 뽑고 밑거름 하고 그럴 일들에 발걸음이 좋았지요.


 늦은 봄날 상추 종류대로 모종 사와 골고루 심어 한 여름 따 먹었어요. 몇 해 전 심었던 깻잎 모종들이 자라고 자라 뽑아낸 후에도 해마다 밭에 깨들이 새끼 모종들처럼 올라와 그 '후손들'을 밭에 이곳저곳 자리 정해 심었어요. 여름 잘 푸르르다 노랑 반점 올라오기 시작해서 '그 좋아하는 깻잎들 인자 다 먹었구나'하고 깨들도 뽑았어요.


 밭에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들 오종종 매달린 네 그루 고추나무만 놓아두고 잡초랑 죽어가는 당귀랑 허브나무들 모두 잘 뽑고 흙들 뒤집어 놨어요. 세 평 남짓 작은 텃밭도 어찌 그리 손이 많이 가는지 농부들의 수고의 손과 힘줄들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지요.

 

 줄을 맞춰 흙들 뒤집고 비료들 한 줌씩 뿌리는 일만 남았어요. 호미와 작은 삽으로 비 온 뒤라 아직 물기 많은 흙들 자분자분 파고 섞고 있었어요. 순간, 흙 속에 지렁이들이 눈에 폭 들어왔어요. '아차, 엄청 놀랬겠구나. 혹시 호미질에 운사납게 다친 놈은 없나?' 해마다 흙 뒤집고 파헤칠 때 지렁이들이 많았었는데 아예, 생각도 못했어요.


'척박한 환경인데 어찌 하필 이리로들 오셨을까? EM 발효액을 많이 뿌려서 냄새 맡고들 오셨나?'


 한참 쳐다보고 볕에 노출되어 위험할까 봐 옆을 파고 잘 숨겼어요. 느닷없이 평화로운 일상에 갑자기 암흑 천지가 된 것처럼 어둠 속이 일상인 저들에게 햇빛은 우리의 어둠이겠지요. 호미질이 느리고 조심스러워졌어요. 한두 마리가 아니었어요. 살살 파다 살피다 했더니 많이 보이더라고요.


 '나 좋자고 면구面灸스럽게 저들의 일상에 파란을 일으켰네.'


지나쳐도, 저들의 파리한 소름과 한낮의 떨림과 예고도 없이 닥친 두려움을 알아보는 이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오래 쳐다보던 느티나무가 알겠지요. 풀들이 뽑히고 버려져 말라가는 시간에 다행히 지렁이들은 흙 속에 평화의 암흑을 헤집다 누워 있겠지요.


 배추 모종을 사다 심고 배추 파먹기 좋아하는 배추벌레들하고 다투다 김장 담가 먹으며 가끔 이 배추에 자리 내어준 민트 허브나무랑 개망초랑 나팔꽃이랑 신선초랑 참깨랑 이름 모를 잡풀들도 기억해내면 좋겠어요, 쉽지 않겠지만. 오래전에 읽은 '김사인'의 시 '풍경의 깊이' 첫 구절, 용케 찾았어요.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면구스럽지 않게 사는 일 보다 면구스러운 일 하고 나면 면구스럽다 느끼는 날이 나으리라 생각해요. 가을바람이 불고 '힌남노'에 아픈 사람들 아직도 많은데, 또 먼 곳 태풍 소식 간간히 오네요. 평화의 날들이 마음에 흐르도록 또 달려야겠어요.

흙들이 가지런하여 속에 든 지렁이들도 가지런히 살아가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애통哀痛 : 기척도 없이 오는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