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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Sep 22. 2022

미안하고 안쓰럽고 대견하고 뿌듯한

 고추 깻잎 배추 자리를 주고받고

작은 텃밭

지난겨울 끝 무렵

땅 헤집고 석회와 계분 깊이 묻고 덮고

봄에 밭 자락 무시로 가꾸고 더듬어

상추 깻잎 고추 당귀 신선초 케일

골고루 한정 없이 맛나게 뜯어먹던 날들


날 선 햇볕 낯선 이름의 태풍

모두들 으스러져 사라질 때

꿋꿋이 서 텃밭 지키고 비빔밥 워주던

깻잎 고춧잎 서서히 무너진다

아득히 먼 곳 향하는 푸른 손 든 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 투로

안녕을 얘기하는 고추나무와 깨들

진딧물 왕담배나방애벌레 잎마름병


가을 오고 날 높고 볕 하얗다

고추와 깨 보내고 배추를 심는다

밭은 휑하고 뽑히고 부러진 고추나무

얽히고설킨 깻잎들 가지들의 아우성

고추의 얕은 뿌리 빼빼 벗긴 통 줄기

어디 눈 둘 곳 없는 미안하고 안쓰러움

어찌 그리 앙다물고 버티어 섰던 거여

미안하고 안쓰러워 잠시 두고 본다  본다


안녕

안녕

선 채 깃발이 되고 상징이 된 고추나무여, 안녕

배추를 심는다 작고 단단한 적 배추 심는다

흙은 여즉 달고 포실해 살포시 뿌리 넣는다

언제 뻗었는가 떡잎 살려 심고 흙 바투 넣고

고루고루 찬찬 덮고 눌러 포롯이 안아 세워

물 주고 바라고 일어선 얼굴 생장점 꿋꿋하여

환하고 밝다 날이 파랗다 심는 일은 좋아라

모종들이 모여 식재가 끝나면 분가한 새끼들만치 멀고 반갑고 대견하다.

큰아이 자라 둘째 낳고 셋째 넷째 그리 태어나

엄마의 자궁 엄마의 탯자리 바다 되고 산이 되듯

고추나무 깻잎들 난 자리에 배추가 섰다

오롯이 잘 크고 놀랍게 자라라

누가 그러했듯 누구도 그러하기를

자리를 넘기며 서로의 안녕을 빈다


늙어가는 가을

꿈에 젖은 식물

간절한 저녁노을


배추가 잘 자랐으면 좋겠다 속 실한 그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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