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92년 12월

한겨울의 지하철 안은 이상하리만큼 더웠다. 내복 위에 점퍼까지 껴입은 영실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았다.
“추우니까 든든하게 입고 나가라”던 엄마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는 따뜻하라는 엄마의 마음보다, 답답한 옷차림이 먼저 미웠다.


새벽의 열차 안은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수레를 끌고 탄 상인들, 낡은 가방을 멘 학생들, 그리고 피곤한 얼굴의 중년 남자들.
그들 사이를 스며들듯 서 있는 영실은, 땀 냄새와 겨울의 습한 공기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신설동역에 도착한 영실은 도시락을 품에 안은 채 내렸다. 복잡한 통로 사이, 그는 갑자기 멈춰 섰다.
“몇 번 출구였지?”
당황한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결국 그는 아무 출구로나 올라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지하철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도시의 공기는 낯설었다. 거리의 불빛은 희미했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 갈 길만 바삐 갔다.
소심한 영실은 그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파출소. 유일하게 세상이 열려 있는 문처럼 느껴졌다.

“저기… 실례합니다.”
파출소 문을 열자 경찰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학생?”
“저… 고려대학교가 어디예요?”
“혹시, 학력고사 보러 왔니?”
“네. 근데 길을 잘 모르겠어요.”

순간 한 경찰이 벌떡 일어나 헬멧을 집어 들었다.
“이리 와, 빨리 타!”
“괜찮아요. 그냥 방향만 알려주시면—”
“시간 없어! 늦겠다, 어서!”

말릴 틈도 없이 영실은 오토바이 뒤에 올려졌다. 차가운 새벽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오토바이는 거리를 가르며 달렸다. 빨간 신호등이 스쳐 지나갔고, 골목의 불빛들이 줄지어 흔들렸다.

그 짧은 시간, 영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꿈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오토바이는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 멈췄다.
“감사합니다!”
영실이 고개를 숙여 외치자, 플래시가 번쩍였다. 뉴스 카메라들이 오토바이를 둘러싸며 셔터를 눌렀다.
‘학력고사 날, 경찰 오토바이 타고 온 수험생.’
그날의 영실은 잠시나마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험장은 이미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영실은 자리표를 확인하고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섰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의 뒷자리에 앉은 건 종로학원 3수생 A였다. 담배 냄새와 자만심이 섞인 말투가 교실을 채웠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3수생이 영실의 도시락을 보며 놀렸다.
“와, 이 녀석은 김밥까지 싸왔어. 소풍 왔냐?”
영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시락통을 열었다.


차갑게 굳은 김밥과 김이 빠진 사이다.
‘엄마는 왜 이런 걸…’
그는 괜히 속으로 엄마를 탓했다.


A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점심 안 먹어.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같은 학원 출신 재수생 B가 물었다.
“형, 빈 속에 담배 괜찮아요?”
“야, 형은 이미 베테랑이야.”
교실 문이 닫히자,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제발 떨어져라. 꼭.’


오후 시험이 끝났을 때,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안암 로터리엔 막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몰려 있었다.

그때였다.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인파를 헤치며 다가왔다. 시험장에서 본 여학생이었다.
뒷모습만 봤을 때도 뭔가 느꼈지만, 지금은 확실했다 — 눈이 부셨다.

그 순간, 버스 정류장 옆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슬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너…”

영실은 숨을 멈췄다. 노랫소리와 함께, 그 여학생이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같은 노래를 들었다.
잠깐이었지만, 세상은 그들 둘만 남은 듯했다.


버스가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발 속에서 흩날렸다. 버스 창문 너머, 여학생의 눈과 영실의 눈이 마주쳤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여학생이 떠나고 영실은 버스 정류장 옆 레코드점에 들렀다. 엄마가 준 비상금을 꺼내, 방금 들었던 그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샀다.
‘김건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테이프를 손에 쥔 순간, 그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영실은 구걸하는 할머니를 보았다. 남은 돈 오천 원을 꺼내 건넸다.
따뜻함이 손끝에 남았다. 엄마가 준 돈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깝지 않았다.


그날 밤, 영실은 동창 현준이를 찾아갔다.
좁은 골목 끝, 낡은 건물 2층.
현준이의 강아지 복순이와 그 새끼들이 마당을 뛰어다녔다.
“복순아, 잘 있었어?”
영실이 손을 내밀자 강아지들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
현준이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야, 들어와. 춥다!”

방 안은 따뜻했고, 낡은 전기난로 위엔 물이 끓고 있었다. 둘은 시험 얘기를 하다 음악 얘기로 넘어갔다.
“난 음악 하고 싶어. 꼭 가수가 아니더라도.”
“멋지다.”
“넌 아직 모르겠지? 대학 가면 좋아하는 거 생길 거야.”
“그럴까…”

잠시 후, 현준이의 카세트 데크에서 쥬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둘은 동시에 소리쳤다.
“Pain! Pain! Killer!”

좁은 방, 김이 서린 창문, 그리고 두 소년의 웃음.
세상은 아직 그들에게 가혹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청춘이 겨울보다 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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