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023년 3월

‘참여할까… 말까.’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가는 어둠을 보며 영실은 한참을 망설였다. 손끝이 휴대폰 화면 위를 맴돌다 멈췄다.
문득, 자기 얼굴이 창유리에 비쳤다. 잔주름 사이로 피곤이 묻어 있었다.
“그래, 가보자.”
스스로에게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며, 그는 결국 ‘참석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눌렀다.

다행히 모임 날짜는 토요일 오후였다. 토요일 오후라면, 잠깐의 일탈쯤은 허락될지도 몰랐다.


올해로 쉰.
영실은 어느새 퇴직이 현실로 다가오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직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인사 구조조정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생존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이어갔다. 평일엔 퇴직연금 관련 자격증 강의를 들었고,
일요일엔 공인중개사 교재를 펼쳤다.책상 위엔 늘 두꺼운 교재가 쌓여 있었고, 커피 잔 옆에는 형광펜이 굳은 채로 놓여 있었다. 가끔 거실을 지나가며 책을 펴는 중학생 자녀들을 보면

“쉬면 안 돼”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쉬는 것은, 사치였다.

‘멈추면 쓰러진다.’
요즘 영실의 인생은 그 문장 하나로 설명됐다.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아 끝없이 페달을 돌리는 느낌.
멈추는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
이제는 정말 잠시나마 브레이크를 잡고 싶었다. 단 몇 분이라도, 그냥 서 있고 싶었다.

그날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박 부장이 다가왔다. 입사 동기이자 인사팀장이었다.
“임 부장, 잠깐 바람 좀 쐬자.”
“응? 무슨 일 있어?”
“옥상에서 커피 한잔 하자.”

겨울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박 부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회사, 요즘 분위기 알지? 내년부터 50 넘은 사람들 지방 보낸대.”
영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지방으로? 거절하면?”
“그럼 본사에 남겨주긴 하지. 대신,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부서로.”
“하… 결국 밀어내는 거구나.”
“그렇지. 지방 계열사든, 이상한 부서든. 둘 중 하나 고르라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박 부장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준비해야지. 창업이든 뭐든.”
“그래도 넌 애들이 다 컸잖아.”
“그건 그렇지. 넌 아직 중학생이지? 그럼 힘들겠다.”
“그래서 더 무섭다. 아직 멈출 수도 없고…”

둘은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봤다.


겨울 하늘 아래, 도심의 빌딩숲은 잿빛이었다. 언젠가 자신도 그 잿빛 건물들 사이 어딘가로 흩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영실의 가슴을 짓눌렀다.


며칠이 지나고, 동창회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영실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졌다.
불편한 사람들과의 술자리, 가식적인 웃음과 안부 인사.
그런 것들이 벌써 피로하게 느껴졌다.
‘안 가면 편할 텐데…’
하지만 동시에, 잊고 살던 이름 하나가 문득 마음에 떠올랐다.

‘햇빛촌… 잘 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어딘가 오래된 마음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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