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한 영실은 학생회실 문을 열었다.
“정규야, 수업 안 들어가?”
탁자 위에는 빈 소주병 몇 개가 굴러다녔다. 정규는 담요를 덮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어? 지금 몇 시야?”
“아홉 시 다 됐어. 또 술 마셨어?”
“어제 89학번 형들이 술 산다 그래서… 나 그냥 오늘은 수업 제낄래. 너 먼저 가.”
영실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점심은 내가 살게. 학생회관 식당에서 봐.”
문을 닫고 나서도 방 안에 남은 술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스무 살의 대학생활이 이렇게 따분할 줄 몰랐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는 있었지만, 설렘은 없었다.
밤마다 이어지는 술자리, 무의미한 농담, 허공에 흩어지는 웃음소리. 영실은 점점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했다.게다가 수업은 또 얼마나 어려운지.
수학과 물리는 그가 아는 세상 언어와 전혀 달랐다.
‘이게 정말 내가 꿈꾸던 대학인가?’
그는 수업 시간마다 창밖의 하늘을 보며 자신을 낯설게 느꼈다.그날 오후, 봄 햇살이 포근하던 날이었다.
영실은 수학 수업 대신 시청각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상영실에서 자막 없는 외국영화를 홀로 보며,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모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는 애기능 언덕으로 올라가 풀밭에 누웠다. 하늘 위의 흰 구름이 느리게 흘렀다.
3월의 바람은 따뜻했지만,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빛났는데… 지금 나는 왜 이렇게 흐릿하지?’
그에게 가장 힘든 건 ‘평범함’이었다. 대학 친구들은 제각기 뚜렷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연애하던 친구, 농구공을 들고 늘 코트를 달리던 친구, 담배를 입에 문 채 세상을 비웃던 친구. 그들 모두가 제각기 빛나 보였다. 심지어 ‘양아치’처럼 보이던 놈들조차 시험은 잘 쳤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도대체 뭐였을까?
칭찬받던 ‘모범생’은 사라지고, 이젠 그저 군중 속의 한 점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 현실이 영실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그날, 학교 복도를 떠돌던 그에게 한 장의 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애기능 동아리 ‘햇빛촌’ 신입생 모집>
저희는 도시 빈민 연구회 ‘햇빛촌’입니다. 현재 산동네 빈민지역을 방문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께 어두운 곳에 작은 빛을 비춰줄 새내기를 기다립니다.
‘햇빛촌.’
그 세 글자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영실은 이유도 모른 채 학생회관 4층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저기요… 안녕하세요?”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자, 퀴퀴한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담배꽁초가 수북한 종이컵,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소주병, 그리고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자는 선배들.
영실은 당황했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눈을 비비며 일어난 선배가 물었다.
“아… 그냥 구경만 하려고요.”
“앉아요. 금방 정신 차릴게요.”
영실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다음에 올게요.”
그러나 그때, 한 선배가 팔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앉아요. 진짜 재밌는 얘기 해줄게요.”
그날, 영실은 도망치지 못했다.
술 냄새 섞인 동아리방 안에서, ‘햇빛촌’ 선배들의 열정 어린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들어야 했다.
도시 빈민, 공부방, 연탄,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대학생들.’
그 모든 말이 처음엔 생소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결국 영실은 회원명부에 이름을 적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 안에서 ‘딸깍’하고 맞물렸다. 그 후로, 동아리는 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93학번 신입생 중 그를 포함해 세 명이 들어왔지만 두 명은 얼마 못 가 떠났다. 남은 건 영실 혼자였다.
2학년 때 그는 결국 휴학을 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던 해, 영실은 햇빛촌의 회장이 되었다.
그의 대학 생활은 그렇게 흘러갔다.
책과 강의 대신, 가난한 골목과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