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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주치의 Mar 29. 2019

6.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Epi.03. 자존감, 분노 조절 어려움, 부부갈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조용히 진료실 바닥만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수현 씨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Pt: “저는 화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흥분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욕도 하고 싶지 않고요.

심한 정도일 뿐이지. 제 자신이 마치 헐크 같습니다. 헐크처럼 주체할 수 없이 화를 내고 나면 이내 배너 박사처럼 자괴감을 느끼고 숨어버리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깊은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나는 수현 씨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수현 씨는 울먹이며 자신의 감정을 터뜨렸다.


Pt: "너무 미안해서 사과조차 못하겠습니다. 저도 분명 화가 난 이유는 있습니다. 그런데 침착하지 못하고 흥분하며 화를 내고 나면 모든 것이 제 잘못처럼 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서로 안고 울고 있습니. 저도 말하고 싶습니다. 왜 사람 화나게 하냐고.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저는 더 화를 내고 있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Dr: “그래요. 본인 또한 화를 내고 나서 힘들어한다는 건 본인이 표출하고 싶은 분노감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건 본인 내면에도 힘든 감정이 있다는 걸 의미하죠. 내면의 우울,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예민하게 만들거든요. 그런 경우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분노, 짜증과 같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결국 그러한 분노, 짜증과 같은 감정이 사실 알고 보면 본인 내면의 우울, 불안 등과 같은 감정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내면에 대한 탐구가 먼저 이뤄져야 겉으로 표현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아질 수 있다는 거예요.”


PT: “제 내면 말입니까?”


Dr: “네.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또다시 수현 씨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침묵이 흐른다.


Dr: “수현 씨에게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건 본인이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 수 있어요. 그것도 다 이유가 있겠죠. 차차 그러한 이유 또한 같이 길을 찾아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거고요. 다만 여기서만큼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가공하지 말고 그대로 밖에 내놓는 것에 익숙해지면 좋아요. 침묵이 흐르는 동안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나요?”


Pt: “저요... 저란 사람요... 사람들이 보는 저라는 사람을 설명해야 하는 건지, 제 관점에서 저를 설명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Dr: “관점에 따라 본인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요?”


Pt: “네. 달라요. 정말 다르네요.”


Dr: “어떻게 다르신지 말씀해주세요.”


Pt: “(망설이는 모습) 우선 저는 생각이 많아요. 걱정도 많고요. 매사에 복잡한 사람인 거 같습니다. 어려서는 혼자 어떤 틀을 만들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뭔가 제게 큰일이 닥칠 거 같아서 혼자 그 틀 안에 갇혀 산 적도 있고요. 

항상 어려서부터 제가 아버지 뜻대로 해드리지 않으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어요. 욕설을 하고 행패를 부렸죠. 한편으로는 저만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면 집안이 편안할 거 같았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무엇 하나 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도 했고 아들도 정말 제 마음에 들고 대견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면 소리도 지르고 욕설도 하고 그럽니다.

제가 보는 저요? 이중인격인 거 같습니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사람과 세상 눈치 보며 사는 사람이 같이 있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보는 저요? 좋은 사람이죠. 원하는 대로 해주거든요. 농담이 필요해 보이면 유머를 사용해서 웃게 해 주고, 고민이 있어 보이면 진심으로 들어주고 달래주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정작 저는 알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는 걸요. (쓴웃음을 지으며) 저는 그런 인간인 거 같아요. 씨발.”


가면을 오래 쓰고 살다보니 이제는 가면 쓴 모습이 나인지, 가면을 벗은 모습이 나인지 모르겠습니다.

수현 씨의 욕설은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에 치료 상황에서만큼은 긍정적인 의미였다. 또한 수현 씨의 다나까 말투가 점차 편안하게 바뀌는 것도 긍정적인 치료 관계가 형성되는 징후로 볼 수 있었.


수현 씨는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타인들이 보는 자신과 자기 자신이 보는 자신이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평가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두 관점에 따른 차이가 클수록 자기 자신이 느끼는 자괴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이유가 맨얼굴의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현 씨는 폭발하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는 치료기법 중 제반응(abreaction)으로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표출함으로써 심리적인 긴장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우 치료적이며 긍정적인 징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신 또한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지 못했던 내용들이 상황에 맞는 질문을 받게 되면 마치 댐으로 막아놓은 물을 방류하듯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어떤 분들은 질문 하나에 30분 내내 이야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들이 원하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다. 이유는 사람마다 각각의 성장 배경이 있고 성장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마음이 다치는 일이 있었지만 당시 적절한 치료를 통해 치유가 되지 못하고 상처가 되어 내면 깊은 곳에 억압시켜 놓은 감정들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겪은 정신적인 갈등을 적절히 해소하는 것을 회피하고 억압, 부정, 격리 등과 같은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그저 가둬놓기만 했다면 (물론 그 또한 저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 무의식의 내용은 치료자의 추측만으로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 갈등에 대한 원인은 각각 본인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내용이 본인 입을 통해 억압된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올 때에 그것이 정답이고 그것이 진정한 통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마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길잡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환자마다 억압되어 있는 갈등의 내용은 환자분이 그곳에 도착해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같이 길을 걸어가며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많은 이들의 억압된 기억에 같이 동행해 보았다. 그 결과 저마다 갖고 있는 내적 갈등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김밥을 도시락통에 넣고 소풍 가는 즐거움 가득 한 길이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이 현실세계에서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저 멀리 무의식의 세계에 억압시켜놨던 기억을 의식세계에 풀어놨을 때 과거 겪은 고통스러운 감정 또한 재경 험하며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과적 탐구를 멈추고자 저항을 나타내기도 한다.


어떤 분들은 혼자 가는 길이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기도 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때마다 정신과 의사는 다시금 길을 갈 수 있도록 때로는 감정적인 지지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환자 자신이 통찰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속을 탐구하며 나아가는 길에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든든하고 힘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증상에 대해 원인을 찾아서 우리는 가던 길을 가야 한다. 이유는 해결되지 않은 채 무의식에 억압해버린 내적 갈등은 지속적으로 환자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수현 씨와 같이 자신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을 반복적으로 느끼기도 하고 의학적 검사를 통해 아무런 내외과적 질환을 찾을 수 없는 신체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학업이나 직장에서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대인관계에서 같은 문제가 챗바퀴처럼 반복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복되는 어려움이 있는 경우 치유되지 않은 채 억압되어 버린 내적 갈등을 탐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Dr: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것들을 용기 내서 잘 말했어요. 수현 씨께서 말씀해주신 것에서 보면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과는 달리 본인 마음속에는 상처 받은 아이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때로는 참고 있던 분노가 터지게도 하는 것 같은데요.”


Pt: “그러게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아버지가 두려워서 제 뜻대로 하는 것을 참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처럼 쉽게 분노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어느 순간 그렇게 아버지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네요.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왜 닮아버린 건가요?”


수현 씨는 자신에게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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