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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필 Dec 11. 2023

회계사 해월 씨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3)

윤필의 주변인 인터뷰 프로젝트

윤필     그래서 일은 만족해? 잘 맞아?     


해월     잘 맞아. 난 어디 소속되어 있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 그 안에서 굴러가는 게 편해.     


윤필     정해진 틀이 있는 걸 좋아하는 거야?     


해월     응. 생각해 보면 일 자체가 재밌다기보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잘 해내는 내 모습이 좋은 것 같아. 일의 모양은 상관없이.

     

윤필     스스로 잘하는 게 중요하구나.     


해월     응. 내가 해내는 게 중요해. 그래서인지 내가 하는 걸 남이 몰라주는 것도 싫은 것 같아. 가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바쁘냐고 물을 때가 있어. 물론 1년 차인 내가 하는 일이 쉬워 보일 수도 있겠지. 근데 바쁜 걸 왜 바쁘냐고 하니깐 힘들더라.

      

윤필     그런 사람이 많았어?     


해월    이것도 일화가 있어. 보통 회사들이 12월 말에 결산하거든. 그래서 회계사들은 12월부터 3월까지 바빠. 근데 가끔 일본계 회사 중에 3월 말에 결산하는 곳들이 있어. 그런 경우는 4월부터 6월이 바쁜데, 하필 내가 맡았던 회사 중에 3월 말에 하는 회사가 있었던 거야. 그걸 우리 팀에서 나 혼자 하고 있었거든? 사람들이 거기 조그만 곳인데 왜 그렇게 바쁘냐고, 왜 힘드냐고 이런 반응이 나오니깐...     


윤필     일일이 설명하는 게 힘들지.     


해월     이거 하기도 힘든데 왜 이 사람한테 설명해야 하나 싶더라.      


윤필     그러면 성취하고 인정받는 순간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직업 같아?

     

해월     다행히 그럴 기회는 많은 것 같아. 사실 난 사소한 거에도 성취감을 많이 느껴. 예를 들어 메일이 왔어. 이 작업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야. 그럼 내가 이게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답변을 써. 그렇게 상대가 이해하면 그것도 나한테는 성취감이야.     


윤필     오.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네.     


해월     맞아. 일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 쉬면 또 심심하잖아. 슬픈 건 날이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거야.   

   

윤필     꼼꼼한 편이야?     


해월     그렇긴 한데, 많이 불안해하는 편이야. 혹시 뭐 빠뜨리진 않았을까. 메일 회신하는데 잘못 눌러서 회사 전체에 보내진 않을까. 이런 걱정.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가방에서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해월 씨. 정중앙에 명조체로 <불안>이 써져 있고 제목대로 불안한 느낌이 물씬한 어두운 색의 책이다. 이런 책을 고르다니. 그녀는 겉모습에 속지 않는 사람인가보다. 책 취향에서 해월 씨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가서 웃음이 났다. 



해월     저번에 서점 갔을 때 샀는데 재밌어보여서...     


윤필     알랭 드 보통이네!      


해월     책 고를 때 목차를 많이 보는 편인데 목차가 마음에 들더라고.          


윤필     불확실성, 능력주의... 혹시 완벽주의야?     


해월     그 정도는 아니야.      


윤필     오호. 조절을 잘하나 보네.      


해월     기복이 있어. 지금은 열정적인 시기라 대화할 때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2주 뒤엔 다를 수도 있어.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나올지도 몰라.     


윤필     아직 그런 적 없어?     


해월     아직은 괜찮은데, 최근에 상사분이 일 배분을 잘못해서 고생했어. 더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양인데 그렇게 되지 않은 거지. 거기다 일 지시까지 명확히 안 해주니깐 나랑 동기랑 우왕좌왕하고 난리였어.      


윤필     뭐야?     


해월     또 문제가, 중간 관리자가 제 역할을 못 하니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상사분까지 영향이 간 거야. 그래서 그분이 일을 더 맡게 된 거지. 우리는 몰랐어. 그러다 보니 ‘너희가 제대로 안 해서 상무님이 고생하셨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 거야. 우리는 우리대로 주말 근무하고 갈피를 못 잡아서 시간 허비하고.      


윤필     역시 소통이 중요하구나. 일은 진짜 명확하게 줘야 해.      


해월     맞아. 내가 생각했을 때 최고의 상사는 일을 잘 내려주는 상사인 것 같아. 뭘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      



윤필     이제 미래 얘기를 해보자. 너는 계속 회사에 남고 싶어?     


해월     지금은 그렇지. 보통 이쪽 계열은 회사에 쭉 남거나 이직, 아니면 개업을 하는 편이야. 근데 나는 금융 쪽이라 개업할 일은 없을 것 같아. 금융 회사들은 보통 4대 법인 같은 큰 곳에 일을 맡기거든.     


윤필     다른 분야로 가긴 어려운 거야? 계속 금융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가?     


해월     옮길 수는 있는데 은행까지 왔으니 계속 금융 쪽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어쨌든 방법은 다른 법인을 가거나 남는 건데 남아도 6~7년차까지는 남을 것 같아.     


윤필     오 대단하다.     


해월     그때가 직급 바뀌면서 몸값이 확 뛸 시기거든. 그 이후로는 이직이 어려워. 몸값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안 데려가.      


윤필     솔직히 요즘 사람들이 한 회사에서 6~7년 있을 거란 생각 안 하잖아. 적당히 경력 쌓고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런데 6~7년을 다닐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해야 한다는 게... 대단한데?


해월     지금 그 연차인 팀원분들도 자기가 왜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의문이라고 말씀하셔. 그냥 하다 보니깐, 눈 떠보니깐 시간이 지나있었다는 거야. 그런 말 들으면 시간이 빠르게 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윤필     어쨌든 신입 입장에서는 먼 느낌이 들 것 같아.     


해월     쉬운 일이 없어.     


윤필     근데 그 정도 생각하는 거 보면 네가 어느 정도 이 일에 애정이 있고 잘 맞는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해월     같이 일하는 분들이 좋아서. 작년에는 팀에 1년 차가 나 혼자였어. 지금 팀은 동기들이 많아. 그래서 같이 일하는 것도 재밌어.


윤필     의지가 많이 되겠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진짜 중요한 것 같아.     


해월     맞아. 근데 또 1년 뒤엔 어떤 반응일지 몰라.      


윤필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다고 말했거든. 3년 정도 버티고 다음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어. 산업군이 달라서 비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6~7년 얘기하는 거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해월     직무 내용보다는 솔직히 성향이 잘 맞는 것 같아.


윤필     일은 그냥 하는 거야?     


해월     일은 그냥 해. 사실 회계사가 하는 일이 삶에 필수적인 건 아니잖아. 그걸 안 한다고 죽는 건 아니니깐. 그래서 가끔 뜬구름 잡는 느낌일 때가 있어. 이걸 이렇게까지 봐야 한다고? 너무 명분만 쫓는 느낌이랄까. 내가 선택했지만 사실 금융도 잘 몰라. 투자도 모르고. 그래서 더 선택한 것도 있어. 이번이 아니면 평생 안 할 것 같더라고. 같은 팀원들은 주식도 하고 관심이 많은데 나는 엄두가 안 나더라. 맨날 옆에서 성공과 실패 사례가 번갈아 들리니깐.



윤필     원래 스트레스 잘 안 받는 편이야?     


해월     잘 받는데 잘 까먹어.      


윤필     빨리 털어버리는구나.     


해월     옛날에는 얽매여있는 게 많았는데 요즘엔 예전보다 훌훌 털어버리는 것 같아.     


윤필     그게 정신 건강에 좋지. 그리고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갔으니깐 웬만한 일에는 잘 안 흔들릴 것 같은데?     


해월     그치. 그리고 나 아직 수습이라..      


윤필     아, 아직 정식 회계사가 아닌 거야?     


해월     응. 아직 수습이야. 공인회계사회가 따로 있거든? 거기에 등록이 됐나, 안 됐나의 차이야. 2년을 법인에서 채워야 인정이 돼.      


윤필     아유 힘드네.     


해월     시험도 두 번 봐야 해. 1년 차 때 한번, 2년 차 때 한번 봐. 직업윤리 이런 거.     


윤필     세상에. 쉽지 않다. 이제 수습 떼기까지 1년 남은 거야?     


해월     1년 남았지.      

 


윤필     일 말고 요즘 관심있는 건?     


해월     얼마 전에 테니스를 시작했어. 재밌더라. 혼자 있는 시간은 별로 없는 것 같아. 혼자 있을 때는 웹툰 보고 그 정도? 영상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엔 드라마도 봐. 책도 다시 읽어볼까 싶어서 샀고.     


윤필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 않아? 난 시간 내서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 보면 대단한 것 같아.


해월     그렇긴 한데, 일해보니깐 알겠더라. 시간 내서 뭐라도 해야 해. 우리가 한창 바쁠 때는 새벽 3시, 4시까지 해도 일이 안 끝나. 새벽에 흐느적거리면서 집 가서 쪽잠 자고, 다시 9시까지 출근하고. 이러면 진짜 뇌가 생각이란 걸 할 틈이 없더라. 그렇게 살아보니 일이 모든 게 될 순 없다, 그건 너무 불행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최대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 같아.     


윤필     그럼, 일 외에 다른 미래 계획이 있다면?     


해월     결혼 계획? 32살 전에 결혼하지 않는다.     


윤필     한다는 게 아니라 하지 않겠다는 계획이네. 왜 하필 32살이야?     


해월     뭔가 32살까지는 너무 30대 초반이라 어린 느낌이야. 33살 정도는 돼야.. 진정한 30대.. 이런 느낌이라. 별거 없지?

     

윤필     너한테 33살이 정말 중요한 나이네. 그때까지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직업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인데 그때의 너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해월     일은 물론이고 생활면으로도 부족함 없이 잘하고 있으면 좋겠어. 건강도 잘 챙기고... 계속 끊임없이 도전할 거리를 찾아다니면 좋겠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것들에 확신이 가득했으면 좋겠어. 바라는 게 많지?  


윤필     아니. 전혀! 무언가 되어 있길 바라기보다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있구나. 좋네. 꼭 그렇게 될 거야.       

             


해월 씨의 선택을 쭉 따라오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녀의 선택에는 늘 자신감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세무사와 회계사 중 이왕 도전할 거라면 어려운 회계사를 선택하고, 다른 분야보다 까다롭지만 이왕 하는 거 알아주는 일을 하는 게 낫다며 금융 업무를 맡았다. 성취와 인정이 중요한 그녀에게 붙은 ‘자신감’을 누군가는 ‘자존심’이라, 또 다른 이는 ‘거만함’이라 칭할 수도 있다. 이야기를 나눈 후, 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 말이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그동안 묵묵히 해왔던 노력에서 나왔다. 고등학생 때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얻은 수학 성적은 훗날 그녀가 회계사를 도전하는 힘이 되었다. 떨어져도 미련 없다고 느낀 시험 날의 감정은 그간 최선을 다해온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녀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해월 씨에게 가까운 미래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무엇이 되기보다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답했다.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 업계에서 이름 좀 날리겠단 답을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되고 싶은 건 없다는, 나의 작가 소개란이 무색할 정도였다. 


성취하는 게 좋고 인정받는 게 기쁜 그녀이지만 겉만 빛나는 것으로 행복을 채우진 않는다. 해월 씨는 그런 사람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의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그 기쁨을 내일의 원동력으로 삼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 모두 행복할 자격이 있지만 거기에 덧붙여 해월 씨에겐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해월 씨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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