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여행기 2편] 먹는 것에 신중한 편
[대구여행기 3편] 한의학이 체질이라
예전에 내가 한 여행은 경주하듯 모든 관광코스를 돌아야 했다. 소문난 맛집은 꼭 가서 맛봐야 했고, 남들 가는 유명한 곳이라면 나도 반드시 따라가야 했다. 숙제하듯 모든 관광코스를 다 돌아야 직성에 풀렸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우선 교통사고 후 몸과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쉬어줘야 하고, 목, 어깨, 허리의 아픔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동선과 시간 계획을 짜서 미션 클리어하듯 돌던 예전의 여행과는 다르게 지금은 발길 닿는 대로 즉흥적으로 여정을 풀어가고, 내 몸이 하는 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귀 기울인다.
원래 계획은 앞산 케이블카 타고 국수로 꽤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면치기와 노을 뷰를 함께 즐기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주차장에 다다르자,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어둑어둑한 하늘에 붉은 노을 뷰는 나오진 않을 듯해서, 케이블카 대신 앞산 해맞이 전망대나 보자 생각했다. 그래도 이미 주차는 한 뒤라 왠지 그냥 돌아가긴 아쉬워서 다음에 올 때를 대비해 어떤 모습인지 살펴나 보자는 생각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정작 케이블카 입구는 보이지 않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숲길로 맛있는 냄새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선 곳,
그곳엔 비가 와서 더 개운한 맑은 공기가 있었고, 촉촉한 가을을 알리는 비가 불러온 약간의 안개와 풀향기, 귀뚜라미,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 비를 피해 떠나가버린 사람들의 발길에서 멀어진 고즈넉한 고요함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브런치를 가만히 열어 나의 생각을 스냅샷처럼 사진과 함께 찍어 놓는다. 지나가면 아련해질 지금 이 느낌과 생각을 떠오르는 그대로 영원히 선명하게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본래 혼자서 하는 여행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길치인 내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정정해줄 또 다른 길눈도 없고,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맛집에 가도 여러 메뉴를 맛보지 못한다. 혼자서 한 여행은 회사 비용 절감 상 어쩔 수 없이 혼자 가야 하는, 혹은 (불편한 윗분들과 함께 가기보단) 차라리 편한 혼자임을 택한 지금과 같은 업무와 관련된 출장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개인적인 여행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100% 혼자가 아니었던, 난이도가 무척 낮은 혼행이었다.
뉴욕에 있을 때 친구가 필라델피아에서 유학 중이라 친구를 보러 필리로 여행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어차피 박물관 투어라 혼자여도 상관없을 여행인 워싱턴 D.C의 하룻 동안의 여행.
캐나다 동부지방을 친구와 함께 여행할 때, 쇼퍼홀릭이었던 친구는 쇼핑을 하고 싶어 했고 나는 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어서 잠깐 따로 여행하기로 결정한 몇 시간.
그 친구가 태국인이었는데, 교환학생이 끝나 각자의 나라에 돌아간 뒤, 친구만 믿고 한국에서 태국행 티켓만 덩그러니 끊어 처음으로 여행 코스를 검색조차 해보지 않은 무성의함과 무계획으로 방문한 태국. 친구가 살고 있는 방콕은 주말에 친구가 함께 돌며 안내를 해주었고, 평일이 되자 회사를 가야 하는 친구가 미안한 마음에 2시간 거리 떨어진 도시의 (심지어 이름도 모른다.) 해변 리조트로 숙소 검색 및 왕복 교통편까지 다 arrange 해 준 현지인 가이드 표 태국 여행의 평일 이틀.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행은 재미는 있지만, 우선 서로 다른 휴가 일정부터 시작해 나와 다른 상대방의 여행 스타일이나 입맛, 취향에 맞춰야 해 서로가 포기할 것들도 생긴다. 특히나 여행은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는 흔치 않은 것이기에 친한 친구끼리 혹은 가족과 같이 가게 되더라도 양보란 것이 힘들어 의견 마찰도 생길 수 있다.
캐나다 동부 여행을 같이 한 친구도 교환학생들 무리끼리 몇 번 여행을 같이 했고, 둘 다 모태솔로였던 것까지 성향이 비슷해 지금까지의 여행에서도 한 번도 의견이 부딪힌 적 없었던 친한 친구였다. 교환학생 학기를 모두 끝내고 마지막 남은 여행지인 퀘벡과 몬트리올에서 쇼핑을 워낙 좋아했던 친구와 쇼핑보단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을 더 좋아한 나는 주어진 짧은 일정에 이동 동선에 대한 의견 조율이 힘들어 결국 각자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떨어지니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 좋은 곳을 봐도 아쉬웠고, 친구도 옷을 입어보고 같이 봐주고 평가해 줄 사람이 없으니 적적했던 눈치여서 다시 만날 시간이 되지 서로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누군가가 동행할 수 있는 여행은 장, 단점이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혼행도 역시 나름의 장,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혼행이 예전보다 거부감이 없어진 것이, 함께하는 여행은 우선 체력적으로 다른 이들의 보조를 함께 맞추는 게 힘들어서다. 잠깐의 산책에도 다른 사람의 빠른 발걸음에 쉼 없는 보폭에 맞춰 걷다 보면, 그날은 몸살이 나기 일쑤다. 혼행의 단점도 나이가 드니 유연하게 커버가 된다. 심심할 때면 차에서 들을 음악을 사전에 다운로드하여 여행 내내 들었다. 그리고 브런치가 있어 사실 모든 여정과 그때그때의 감정을 기록하느라, 그리고 대강 짠 계획에 예상치 못한 전개로 매번 폭풍 검색하느라 바빠서 사실 심심할 틈도 없었다. 길치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나 그래도 어플이 많이 발전한 덕분에 지도를 보면서 떠났던 예전의 여행보다 낫고, 사진 역시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다. 이번 대구행에서 나의 사진사가 되어 주셨던 기억에 남는 친절한 행인들을 잠깐 소개해볼까 한다.
1) 가족 단위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진을 찍고 있던 무리에 젊은 여자분께 사진을 부탁했더니, '어머, 제가 사진 잘 찍는 거 어떻게 알고?' 하는 농담으로 답을 주시는 유쾌한 분이다. 한 번은 손을 내리고 찍고 한 번은 브이를 했더니, 카메라 앞에서 목석과도 같은 나는 그만 포즈가 고갈되어 계속해서 브이질 중인데, '어머, 같은 포즈 하시면 안 돼요.' 하는 애교 섞인 말투로, 직업이 혹시 사진사가 아닐까 의심되는 이 분의 예상치 못한 멘트에 그만 웃음이 터져 버린다. 그래도 생각 나는 포즈가 없어 그렇게 처음으로 하트표를 사진기를 향해 날리며 환하게 웃는 사진이 탄생했다.
2) 산책길에서 산책하러 큰 개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께 부탁했더니, '이거 어찌하는 거지' 하시더니 100장 연속 사진을 눌러버리셨다. '그래도 오히려 저런 사진이 그중에 잘 나온 게 더 많이 있을 거예요'라고 쿨하게 말씀하셔서 웃음이 터졌다. '어찌해야 잘 나오나' 입 밖으로 고민하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 주신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다리가 짧아 보이는 위에서 찍어 누른 듯한 각도로 찍어 주시긴 했지만, 열정과 마음만은 프로이신 그분의 100장 연속 사진은 볼 때마다 웃음이 나서 산책길의 추억이 되었다.
3)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삼각대를 들고 있는 어린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했더니, 처음에는 남자 친구가 찍는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여자 친구가 그 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휴대폰을 냉큼 뺏어 들더니 꺾어지는 현란한 손목 스냅의 각도와 한껏 굽힌 무릎으로 몸까지 낮춰 일명 다리가 길어 보이는 각도로 촬영을 해준다. 사진 똥 손인 내 눈에는 첫 번째 사진도 나쁘지 않았는데, 확실히 두 번째 사진이 마법처럼 얼굴은 작아 보이고 다리도 길고 날씬하게 나왔다. 역시 장비부터 포스가 남다르긴 하더라니.
캐나다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다가와서 사진 찍어 줄까라고 물어봐주는 적극인 친절함은 아니지만, 한국 분들은 무엇보다 사진 찍는 사진이 중요한 여행객의 심정을 잘 알아서 다가서면 흔쾌히 유쾌하게 다들 사진 찍어주신다. 무엇보다 국민 전반적으로 사진의 각도, 프레임, 구도 등의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어 어느 나라 사람보다 사진 찍어주는 기술의 평균치가 높기에 비교적 만족도 높은 사진이 나온다. 유럽에서는 날치기가 많다고 해서 찾기도 힘들었던 한국사람에게만 사진을 부탁드렸는데, 국내 여행은 마음 놓고 길가는 누구에게나 사진을 부탁할 수 있어 좋다.
다양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좀 아쉽긴 한데, 비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야시장은 막창과 같은 혼자 먹기 힘든 메뉴를 1인분으로 팔기도 하므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 안됨 2인분이라도 먹어야겠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브런치에 적다 보니 눈앞으로 팔을 앞뒤로 격하게 흔들며 산책로를 돌고 계신 아주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머니를 따라 홀린 듯 나도 벤치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힘찬 팔의 움직임만큼이나 힘찬 아주머니의 보폭은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누구보다 느린 걸음으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천천히 걷는다. 혹여 조금이라도 피곤하면 벤치에 앉아 쉬고, 다음에 가고 싶은 곳은 즉흥적으로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정한다. 항상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의 선호나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했는데, 혼자 떠난 여행은 모든 걸 나에게 맞춰 여행한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보조를 맞춰주느라 듣지 못했던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온전히 나를 마주한다. 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나도 미처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나를 찾아서,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난 기분이다.
그렇게 나는 이번 여행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롯이 나와 함께 걷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