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고 육아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졌다.
2010년에는 초등학교 입학 후 적응 기간이라 하여 입학 후 2주 동안 2교시만 하고 하교하였기에 10:30이면 교문 앞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적응기간 이후에도 급식 후 귀가라 12:10이면 하교였다. 하교 이후부터 엄마의 퇴근시간까지 학원을 보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원들이 오후 2시부터 수업을 시작하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다. 아이가 하교 후 2시간 여의 남는 시간 동안 함께 보낼 어른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아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생활에 적응할 시간 동안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막막했다. 독박 육아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아이에게 물어봤다.
"앵글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뭘 제일 하고 싶어?"
"응~ 나는 두 가지 하고 싶은 게 있어. 하나는, 내 생일에 같은 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서 생일파티를 하는 거야. 나 한 번도 안 해봤잖아. 또 하나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엄마가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주는 거야."
첫 번째 부탁은 어렵지 않았다. 하루 휴가를 내고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부탁은 고민이 되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엄마표 간식을 만들어 주려면 엄마가 집에 머물러야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그러다가 잠시 잊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어릴 때부터 집에 혼자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집 열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캄캄하고 온기 없는 집이 무섭고 싫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하지만 그 시절은 가정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가야 했었다. 함께 점심을 먹는 친구 중에 매일 엄마가 예쁜 도시락 가방에 정갈하게 반찬을 담고, 밥 위에는 콩이나 계란 지단으로 하트를 그려주거나 가방 안에 '사랑의 쪽지'를 써서 넣어주는 분이 계셨다. 그 친구를 보며 많이 부러웠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저 친구 엄마처럼 나도 집에서 내 아이를 맞이해 줘야겠다. 맛있는 간식도 만들어주고, 예쁜 도시락도 싸줄 거야.'
기억이 떠오르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을까 생각하게 됐다. 정작 내 아이는 외롭고 힘이 드는데 표현하지 않으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일주일쯤 생각하다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는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아이가 원하는 것을 흠씬 들어주기로 결정을 하고 과감히 휴직계를 냈다.
20세부터 38세까지 쉼 없이 직장을 다녔다. 갑자기 주어진 전업주부의 삶은 신세계였다. 일만 하다가 주부의 삶을 살아보니 이 세계 속에서 나는 이방인 같았다.
첫 번째 난관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실 할 홈웨어가 전혀 없는 거였다.
옷장 가득 채워진 정장류의 옷들은 아이 등하교를 돌봐주며 입기에 영 맞지 않았다. 그렇게 입문하게 된 치랭스는 또 다른 세계를 선물해 줌과 동시에 10kg의 몸무게도 덤으로 얹어 주었다.
두 번째 난관은 아줌마 세상에 들어가는 거였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면 이사를 가지 않는 한 한 동네에서 초, 중등학교를 같이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1학년 입학하면서 어울렸던 친구들과 절친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다. 그런데, 유치원부터 같이 다녀고 학교에 입학하는 무리가 대부분이어서 기존 무리에 끼어들어 어울리는 일은 배우자 고르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려웠다. 초인적인 적응력으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자존심, 자존감 다 내려놓고 무리 안에 들려고 노력했다.
8시가 되면 (초등학교 등교시간이 08:30까지였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책가방 행렬이 이어지고, 1, 2학년 엄마들은 아이들의 책가방을 제 어깨네 메고 함께 교문 앞까지 갔다. 그렇게 한 두 명씩 교문 앞에서 마주친 엄마들이 학교 앞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씩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모여 있던 엄마들의 아이들이 모두 모이면 단지 내 놀이터에 아이들을 놀리고 싸들고 온 간식이며 음료수를 나눠 먹였다. 그러다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보채면 품앗이하듯 돌아가며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함께 놀고 밥을 지어 먹였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동안 많은 무리의 아줌마 친구들이 생겼다. 그중 자연스레 없어진 무리도 있고, 새로 생성된 무리도 있다. 아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사회화되는 동안 엄마도 아이와 함께 사회화되며 아줌마의 옷이 자연스러워진다.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내면의 나도 같이 성장했다.
직장 안에서는 일에 관련된 만남이 주가 되기 때문에 지나가는 빈말은 대체로 하지 않는다. 아줌마가 되고 나니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 안면만 있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 무리의 색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각기 무리의 성격에 맞춰 적응해야 했다. 한 동네 사람들이고 한 학교에 다니다 보니 그 안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친절한 말과 미소로 응대해야 사회생활 잘하는 아줌마가 된다.
내 안에 나이테가 둘러지며 마음의 변화, 몸의 변화가 생겼다. 큰 아이가 18세가 되는 동안 수많은 사회적 친구들이 생겼고 크고 작은 상처도 딱지가 생기고 흉터를 남겼다. 몇 년 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프고 나서 사람과 관계하는 나만의 규칙이 생겼다.
진심으로 대하자!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자!
빈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는 칭찬도 험담도 하지 말자!
사람을 대하는 규칙을 세우고 살아보니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내 태도가 낯설어
"너는 참~ 중간이 없어~"
라고 말하던 동네 친구들이 지금은 나를 '핵인싸'라고 불러준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잘 전달되고 있는 것 같다.
지나가다 한 동안 못 만났던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의례적으로
"오랜만이야! 반갑다!! 우리 언제 커피 한 잔 해!"
라고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진심을 다하자고 생각한 후부터는 하지 않게 된 인사치레다. 사실상 커피를 마시고자 해서 던진 말이라기보다는 특별히 할 말이 마땅찮아서 '밥 먹자' , '차 마시자'로 어색함을 때우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즘 나는 핸드폰 스케쥴러를 꺼내 들고
"언제 만날까? 지금 날짜 잡아... 각자 너무 바빠서 약속을 정하자 않으면 못 만나게 되더라."
라고 한다. 덜 친한 이웃은 당황하기도 한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너무 적극적이어서 가슴이 벌렁거렸을 수도 있다. 나는 이웃들에게
"나한테 커피 한 잔 해. 밥 먹자.라고 이야기할 때는 진짜 함께 만나고 싶을 때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가도 섭섭해하지 않을게. 정말 차 한 잔 나누고, 밥 한 끼 먹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얘기해."
이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동네 친구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정말 함께 하고 싶을 때 약속을 함께 정하고 시간을 맞춰 되도록 약속을 지키려 하고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건강한 에너지를 전하는 관계가 많아지니 마음의 분주함이 사라졌다. 말만 일삼고 겉치레로 말하는 사람들과 거절을 못해 한 자리에 앉아있던 경험들이 있을 테다. 그런 자리는 나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상대도 불편했음을 이젠 안다.
건강한 만남을 갖고자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건강 때문이다. 모임 안에서는 즐겁고 많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같은데 집에 돌아왔을 때 에너지가 방전되고 다음 모임이 걱정된다면 그 모임은 나와 맞지 않는 자리다. 건강한 만남은 돌아선 후에도 에너지가 충전된다.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기억되고 다음 만남이 기대가 되는 사람, 나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내 행동과 언행에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언제나 나에게 가장 진실되고 정직한 사람이 되자"라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