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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Jun 21. 2020

Ep2. 베드버그, 굶주림, 첫 직장

호주 워킹홀리데이 일지 2화(2018.04)

호주 워킹홀리데이 일지 2화(2018.04)



세상은 넓고 호주도 넓다. 세상엔 별 희한한 것들이 참 많죠. 호주도 그래요. 난생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베드버그(Bedbug)'란 자식을 만납니다. 숙소를 구하고 마지막으로 머물던 백팩커스에서였죠. 베드버그란게 뭔지도 몰랐던 저는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빈대나 벼룩과 비슷한 친구더군요) 4일을 이 친구에게 시달립니다. 처음엔 단순히 모기가 물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분명 자면서 모기 특유의 '윙~윙~'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었어요. 다리부터 시작해서 팔까지 온갖 물림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고, 자면서 온몸을 긁어대기 시작했습니다(정말 박박 심하게 긁었어요). 셋 째 날에는 그 수를 세어보니 50군데가 넘는 곳을 물렸더군요.


혐오스럽지만 죄송함미당. 당시 물린 자국. 양다리와 양팔에 저렇게 모기에게 물렸을 때와 비슷한 자국들이 남습니다


단순히 '모기가 많아서 그런가' 하고 둔하게 생각했던 저는 같은 방, 옆 침대 독일친구들에게 제 다리를 보여줬죠. 그때 그 친구들의 표정과 대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Oh my, Fucking Bedbug man!!! You Alright?? (얼마나 우렁차고 또박또박 발음하던지. 평소 그렇게 얌전해 보이던 한 친구가 입을 악어처럼 벌리며 놀라더군요.)" 그때 비로소 베드버그란 놈의 존재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고, 당장 백팩커스 매니저에게 가서 제 다리를 보여줬습니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는, 상당히 당황한 목소리로 점잖게, 미안하다며 제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하루치의 숙박비를 받지 않고 방을 옮겨주더군요.


두 번째 혐오사진도 죄송. 이렇게 조그맣게 생겼대요. 실제로 보진 못했어요. 봤으면 씨를 말렸을텐데.
당시 썼던 일기. 너무 가려워서 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잤습니다. 거의 30분, 1시간마다 잠에서 깼던 것 같아요.
스펠링은 틀렸지만 라임 좋지 않나요. Bedbug Bad Bug.


베드버그는 주로 오래된 건물이나(제가 머문 오래된 백팩커스처럼요. 저렴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군요.) 가구 속에 숨어 산다고 합니다. 낮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가, 사람이 잠든 조용한 밤에 활동하지요. 모기와 다른 점은, 모기는 날아다니며 온 몸 군데군데를 한 번씩 물지만, 이 놈은 기어 다니기 때문에 물린 자국이 방향성을 띠고 연속됩니다. 호주에 계신 분들 중, 이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계시다면 당장 베드버그를 의심해보세요.


4일을 밤잠 설쳐가며 개고생하고 나서야, 백팩커스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약 사서 바르니 금방 낫더라구요. (흉터는 몇 개월 가더라구요.) 더 최악은, 베드버그가 너무 작아서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캐리어를 탈탈 털고, 모든 짐을 샅샅이 뒤져봐야 했습니다. 이 놈이 끈질기게 숨어서 집을 옮겨도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우씨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했어) 캐리어에 있는 모든 옷들을 60도의 고온에서 세탁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지 못할 기억이었습니다.


드디어 구하게 된 숙소. 트윈룸(2명이서 쓰는 방)이었는데, 룸메이트는 이탈리아 친구.


드디어 숙소를 구했습니다. 인스펙션(집을 계약하기 전에 방문해서 살펴보는 일)을 한 5곳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이 집이 외관상 오래되어 보이기도 하고, 그닥 깨끗해 보이진 않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가격과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트윈룸 치고 가격이 저렴했고, 한국사람이 없어 영어공부를 하기엔 최적이라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인스펙션 당시 저를 반갑게 맞이해준 친구들에게 끌렸습니다. 타지에서 외로이 떠도는 낯선 한국놈을, 이 친구들은 정말 따뜻하게 맞아주더군요. (역시 모든 판매는 감동에서 시작된다.)


프랑스 Riyad / 일본 Azusa / 이탈리아 Max / 인도 Pallov /


네. 왼쪽 빨간옷, 오른쪽 흰옷 입은 저 정체모를 헤어스타일남이 접니다. 저때만 해도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 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이런 사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제기랄 사진이 이것밖에 없네요ㅋㅋㅋㅋ큐ㅠ


1년 동안 내 발이 되어준 씽씽이. 그립다 씽씽아.

두 번째 자전거를 샀습니다. (말끔한 중고예요.) 시드니도 꽤 크기 때문에, 도보로만 이동하기엔 부담이었어요.(버스, 지하철 요금 아끼려공)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산 자전거는 일주일 만에 도둑맞았습니다. (그래 기억났다.) 백팩커스를 전전하던 때, 숙소 앞 전봇대에 자전거를 매어놨죠.(당연히 자물쇠로) 다음날 보니 뒷바퀴 하나만 남아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셨을까요? 자물쇠가 걸린 뒷바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손으로 해체해서 가져간 겁니다. (와 대단해 시드니 진심 인정한다. 이곳은 정글. 가져갈 게 없어서 빈털터리 여행객 자전거나 털어가고(개수배ㅑㅈㄹ 니아ㅗㄹ;ㅂ졷ㅅ자식들)


유난히 쓸쓸해 보이던 달링 하버( Darling Harbour)

달링 하버는 시드니의 유명한 명소입니다. 큰 배가 들어오는 곳은 아니지만, 여러 보트들이 오갈 수 있는 규모의 아름다운 항구예요. 큰 배가 들어올 땐 사진 가운데에 있는 피어몬트 브리지(Pyrmont Bridge)가 열리면서 길이 생겨요. 다리가 움직이는 걸 1년 동안 3~4번인가 밖에 못 봤네요. 제가 구한 숙소도 Pyrmont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달링하버와 5분 거리였죠.


이젠 정말 일자리만 구하면 됐습니다. 가장 어려운 난관이었죠. 이때가 초기에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가져간 돈은 바닥을 보이고, 집세는 나가기 시작하고, 다시 한인 일자리를 구하고 싶진 않았어요. 1주일 안에 일을 못 구하면, 신용카드를 써야 될 상황이었습니다.(비싼 해외수수료)


사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이 당시에는 2년이나 호주에 있을 줄 몰랐지요. 1년 안에 모든 걸 준비해서 하루빨리 세계일주를 떠나고 싶단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한인 일자리라도 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현지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니 마음이 참 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낯선 외국인에게 전화가 한 통 옵니다.

호주로 간 2달 동안은 정말 시간과 돈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워홀 준비하시는 분들은 초기 자금을 좀 넉넉히 챙겨가시길ㅎ
당시 나의 주식. 쌀이나 다른 음식 살 돈은 없고, 그나마 싼 라면과 빵이 제 유일한 구원자였지요. 대한민국 라면 만세.
이력서를 하루에 50장 정도 돌렸던 것 같네요. 그중에 가장 처음으로 견습(Trial) 요청이 온 레스토랑 CASA


낯선 외국 여자의 목소리.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식은땀이 뻘뻘 나더군요. 그거 아시나요. 눈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외국인과 하는 대화보다, 전화로 하는 영어가 몇 배는 더 어렵다는 사실. 하나도 안 들려요. 전화로 뭐라 쏼라쏼라 하는데 내용의 절반도 못 알아듣겠더군요. 거의 10분을 통화한 것 같습니다.(정말 간단한 내용이었는데..) 알고 보니 제가 이력서를 넣은 식당 중 한 곳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죠. 그 매니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저를 달래며, 천천히, 아~주 찬찬히, 발음도 또박또박 신경 써주며 말했습니다. "내일 시간 되니? 오후 몇 시에 견습(트라이얼) 가능하겠어?" 요점은 그거였지요. 드디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방에서 고함을 질렀지요. 아싸 !!!


면접 전화를 받고 썼던 일기.  그렇게 좋았니?


다음날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들뜬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찾아갔습니다. 직원도 많고, 규모가 있던 식당이라 기대가 좀 되더군요. 매니저가 친절히 이것저것 가르쳐주며, "이번 주 너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할게." 아르바이트에도 견습이 있다니. 한국에서 다양한 알바 경험을 했지만, 막상 견습시기를 겪게 되니 긴장 되더군요. 당연히 한국인은 없었고, 안 되는 영어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비장해졌죠.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리스닝/스피킹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굉장히 긴장되고 어려웠습니다. 마치 맥도날드에서 가장 바쁜 점심시간에 일을 하며 , 한 문제도 틀리면 안 되는 영어듣기평가를 하는 기분.


트라이얼을 하는 첫 주. 일을 구했다고 좋았었나 봅니다. 짜식.


무사히 트라이얼을 마치고 난 뒤, 그 다음 주에 짤렸습니다. 허허.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살짝 실성할 뻔했지요. 이유는 실력 부족. 아직도 기억납니다. 매니저가 제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면전에서 했던 말 . 굉장히 담담하고 차갑게 말하더군요. 제가 추측한 원인은 결국 영어였습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저는 아직 충분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였죠. 안 되는 영어로 그렇게 밝게 웃고 열심히 뛰어다녔건만, 실망스러운 결과와 냉정한 현실에 저는 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다시 호주를 간다면 저기는 꼭 다시 한번 들리겠어요. "음 여기 음식은 제게 충분한 수준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말해주고 오겠다.


뭐 4월은 그렇게 그지 같은 일들과 씁쓸했던 경험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돈은 떨어져 가고, 일은 못 구하고, 호주가 나를 자꾸 들었다 놨다 했죠. 그래도 사람 죽으란 법 없습니다. 다음 달에는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요. 허허허. 커밍순. (쓰면서 옛날 생각도 나고,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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