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지 D+24 (2020.07.05)
어젯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에게.
술 때문이었다.
끔찍한 숙취와 함께 최악의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문제의 시작은 어젯밤 놀러 간 친한 친구의 집들이. 가장 친했던 동네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이는 반가운 자리라 기분이 한 껏 들떠 있었다. 친구 와이프가 기대 이상의 솜씨로 준비해놓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달달한 소주를 정신없이 들이켰다. 그저 좋았다. 기분 좋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끌벅적하면서도 유쾌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내 필름이 끊기기 전까지는.
어느 시점 이후부터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증인들에 따르면) 그렇게 꽐라가 된 나는 개진상이 되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에 취한 난 잠시 친구집 거실 옆방에서 여자친구와 통화를 한 것 같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옆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막말을 했단다. 여자친구는 크게 상처 받았고, 오늘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들 앞에서 하나뿐인 애인의 체면과 자존심을 짓밟아버렸다. 대체 난 뭐에 발끈했는지, 이성의 끈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나와 내 여자친구의 얼굴에 먹칠을 했던 걸까. 나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샌드백이 있다면 내 사진을 붙여두고 사진이 부스러기가 될 때까지 후드려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자리에서도 친구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상소리를 했다고 한다. 당연히 기억에 없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무말이나 지껄이고 친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 같다. 난 대체 왜 그랬을까. 이 미친놈새끼. 이런 건 내가 원했던 술자리가 아니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번듯한 가정도 꾸리고, 착실히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대 때처럼 시끌벅적 쓰잘데기 없는 농담이나 따먹는 신나는 분위기도 좋지만, 30대가 되어 어른처럼, 자신만의 인생을 나름의 방식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내 발로 걷어차 버렸다.
어제의 나는 분명한 개진상이었다.(여러 증인들에 따르면..) 내가 나에 대해 잘 몰랐던 걸까. 내가 알고 있는 내 모습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술자리에서 만큼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 난 분위기 메이커도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귀 기울여 듣는 사람도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아끼고 신중하게 대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그저 통제불능이 되어 사랑하는 이에게는 상처를, 끈끈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에게는 실망감을 준 그저 꼰대 망나니였을 뿐이다. 이제껏 나이를 헛 먹었나 보다.
앞으로 술과 나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이 이젠 무섭다. 처음으로 술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아무 때나 고삐 풀고 나댈 수 있는 나이도, 뒷 생각 없이 사고나 치며 살 상황도 아니니까. 나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통제할 수 있을 만큼만의 자유를 허락하자. 그게 왜 필요한지 이번 일을 계기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두 번 다시 이런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글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미안해 유정아. 그리고 사랑해.
미안했다 친구들아. 사랑한다.
앞으로 잘하자 백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