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길에 들어서다
2017년 5월 13일 이른 아침 나와 아내는 수술하기 전 대기실에 머물러 있었다.
수술하기 전 아내 배에 아기의 심장소리와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장치를 하나 붙였고 아이의 심장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심장소리에 딜레이가 들려왔다.
보통은 콩콩콩콩콩콩 이런 식으로 가야 하는데 콩콩콩콩 v콩콩콩콩 v 이런 식으로 심장이 잠깐씩 쉬는 듯한? 소리가 잠깐 약한 건지 안 들리는 건지 한 번씩 소리가 멈추는 그런 느낌이었다.
소리가 이상해서 간호사분께 확인을 해봤더니 심장 판막에 작은 구멍이 뚫린 거 같다고 했다.
자세한 건 아기가 나오고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이 낳기 바로 직전 불안감을 가지고 우리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아내가 곧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 혼자 복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수술실 쪽에 등을 기대고 홀로 수술실에 누웠을 아내를 생각하니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마침 수술동의서를 가져왔다.
수술동의서에 내용을 쭉 읽어보니 서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용에는 모든 게 잘못되었을 경우 병원에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글들이었다.
수술실에 두 생명의 인생을 잠깐 동안 내 능력밖의 외부 요인에 맡긴다는 것에 동의를 해야만 하는 서명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서명을 하고 기다렸다.
수술은 시작되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우렁찼고 울음을 듣고 방금 태어난 그녀도 울고 나도 울고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탯줄을 자르라 했고 탯줄을 자르러 가며 수술대에 누운 아내를 보았다. 힘없이 누워있는 아내 그리고 쩌렁쩌렁하게 우는 아이, 축복의 탯줄 커팅식
모든 게 좀 아이러니했다. 슬프고 기쁘고 감격스럽고 찌릿한 감동이 느껴지는 그런 장면이었다.
탯줄을 자르고 나와서 먼저 장모님께 연락드렸다. 장모님 목소리를 듣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딸을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미안함의 눈물 그리고 드디어 아이가 나왔다는 기쁨의 눈물 동시에 나와서 그런지 눈물이 꽤 많이 나왔다.
그 이후 다른 어른들께 연락을 돌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이를 보러 갔다.
발목에 누구의 아이 써져 있었고 핏덩어리가 치워지지 않은 탯줄이 잘린 체 갓 나온 아기의 모습이었다.
얼굴, 손, 발 모두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씻기러 들어갔다.
나는 동시에 입원실로 아내와 둘이 이동하였다.
정신없는 2시간이었다. 감성적인 부분도 작용하고 문서 서명 알림 뭔가 사무적인 부분도 해야 했던 2시간이었다.
모든 게 다 끝나고 아침햇살이 드는 입원실에 아내와 나 단둘이 입원실에 있었다.
조용했다.
공기는 따듯했다.
아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으나 너무 아름다웠고 뽀뽀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멀리서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그냥 그 순간만큼은 아기가 잠깐 잊히고 아내에게 평생 잘해야겠다는 다짐만이 남은 순간이었다.
드디어 아내가 깨어나고 그날 바로 아이가 우리 입원실로 들어왔다.
우리 세 식구 한자리에 모인 첫 순간.
일단 나는 아이를 안는 법을 배웠다. 어색했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체 소중한 그리고 약한 작은 아이가 어떻게 될까 봐 내 커다란 어깨와 팔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음도 조마조마했다. 실수라도 내가 떨어뜨리면 어쩔까.
아내도 초보 엄마로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은 배울께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이 우유 먹이는 법, 울 때 달래는 법, 기저귀 가는 법 등등 여러 가지 아기에 대한 부분은 다 처음이기 때문에 다 배워야만 했고 막상 현상들이 처음 나타나면 당황하기 일쑤였다.
보통 아기는 계속 잠만 자다가 눈을 가끔 뜨고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는데 이때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애썼고 보이지도 않는 그녀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춤도 추고 웃긴 표정도 짓고 하였다.
나의 마음이 그녀에게 와닿기를 바라며 돌아오지 않는 허공에 소리치듯 신나게 나만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 어느덧 입원실에서 조리원으로 갔고 조리원에서 퇴원할 때가 되었다.
소독과 세차를 싹 해둔 깔끔한 차에 두 귀빈을 모시고 우리의 새 보금자리로 이동하였다.
원래는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를 갖고 낮기 전 좀 더 나은 보안을 위해 아파트를 하나 구매 하게 되었다. 대출을 껴서 좀 무리하게 산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좀 더 넓고 안전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 새 보금자리에 첫 입성한 우리 세 식구.
2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었고 아이를 거실 한가운데 눕히고 우리 둘은 소파에 잠깐 앉아 쉬었다.
조용하고 또 고요했다. 햇살이 거실로 들어오는데 아기의 미래처럼 뭔가 너무 밝고 화장한 느낌이었다.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 적막을 즐기던 차에 갑자기 어디선가 뿌직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기저귀에 응가를 하였다.
매뉴얼대로 그리고 연습한 데로 잘 처리를 하고 엉덩이를 한번 씻겨주려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보일러가 고장이 난 것이다!!!!!
지금이야 경험이 있어서 보일러 고칠 동안 따듯한 물에 수건 적셔서 몸을 닦아주던가 아니면 물을 끓여서 대야에 찬물 섞어서 아기를 씻기면 되는 걸 알지만 그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아이에게 적당한 물온도가 있어서 그걸 맞추지 않으면 아이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온도계도 사고 그랬는데 보일러가 고장 났다니!!
하루라도 씻기지 않으면 아이몸에 이상이 생길 것만 같았고 특히 여자 아이라 응가나 쉬를 하고 물로 매번 씻겨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보일러가 고장 난 것에 대해 정말 불안 감히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겨울도 아니고 따듯한 5월 중순이었다.
마음이 너무 급해서 보일러 기사님을 부르는데도 사정을 설명하고 좀 다급하게 일정을 잡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성대한 신고식이 치러지게 되었다.
아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대학병원을 가서 장치를 붙이게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장치를 붙이고 며칠 동안 지켜보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을 하는 상황인 것이다.
다행히 심장 안 판막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라 하셨다.
아이가 태어나서 몇 번의 시련이 있긴 있었다.
황달도 있어서 황달 치료도 며칠 했었고 심장 문제로 또 대학병원도 가게 되고...
이런 걸 몇 번 겪으니 아이가 아픈 게 우리 부부 본인이 아픈 거보다 더 큰일이었고 더 걱정이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가 안 아픈 게 우리에게 아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며 최고의 선물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랄까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냥 지금은 아이가 건강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나중에 커서 늙어도 건강하고 정상적으로만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컨셉? 어떤 아빠가 될지 미리 생각하고 그 이미지 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부장적인 아빠?
친구 같은 아빠?
묵묵하지만 그래도 츤데레 아빠?
지금 당장 선택하긴 어려운 면이 있는 게 아직 아이가 앞도 보이지 않는데 어떤 아빠가 되겠다는 게 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난 그냥 편안한 아빠가 되고 싶다. 친구 같은 아빠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다가올 수 있는 아빠
평생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분명히 오기 마련인데 이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아빠였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면서 마음속의 이야기나 어려운 곤경에 대한 부분을 부모님께 잘 말 못 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에게도 말 못 할 고민들도 많게 된다.
물론 부부끼리는 고민을 털어놓지만 결혼 전까지는 정말 혼자인 느낌이 강하게 들곤 한다.
그럴 때 고민해결, 고민을 터놓고 들어 줄 수 있는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다.
아직 정말 머나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난 놀이터 같은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다.
가만히 속이불에 쌓여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는 내 딸을 보며 나도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순간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아빠의 모습을 꿈꾸고 상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