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데칼코마니를 아시나요? 어린 시절, 잉크를 흘리고 접었다 펼치는 활동 자체도 재밌지만 예상치 못한 그림이 되어서 어쩐지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심리검사 중에서는 몇 개의 잉크 반점 카드에 대해서 무엇이 보이는지, 그 위치와 그림의 특성을 묻는 로르샤하 검사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헤르만 로르샤하가 1921년에 개발한 투사적인 검사인데, 이쯤 되면 '심리테스트' 아니야?라고 묻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지 잉크일 뿐인 '중립적인 자극'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연상 과정만이 보여주는 심리적 특성들이 있습니다.
Exner와 Weiner라는 두 학자는 이 잉크 반점 카드에 대한 반응을 분석하는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반응의 여러 측면들을 기호화하고, 흔히 나타나는 반응, 정서, 대인관계, 사고 과정 등을 객관적인 지표로 산출하고, 그 지표를 중요도에 따라 해석하는 순서를 마련했습니다. 심리검사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어서 2010년대 들어서 R-PAS라는 새로운 체계로 진화되었지만,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는 아직 Exner와 Weiner의 체계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리검사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나도 몰랐던 복잡다단한 심리적 영역들을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기쁠 때, 이별할 때, 대인관계에서, 일을 처리할 때, 내가 왜 그런 식으로 느끼고 행동하게 되는지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부분이나 불편했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어쩐지 내가 막연히 불편했던 지점이 이해되고 조금 편안해집니다. 또 어떤 부분을 더 살리고 어떤 부분을 조금 노력할지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개발이 되고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사용되어온 로르샤하 검사를 통해 심리적 영역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막연히 '정서', '정체감', '대인관계'라고 이름 붙여온 것에 어떤 구체적인 영역들이 있는지 나누어서 보면서 그 개념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좋아질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정체감'의 영역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안정적인 정체감 Identity은 3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유년기에는 부모님, 형제자매들이 마치 나인 것처럼 구분이 모호하다가 사춘기를 거치면서 점차 정체감을 형성해 나갑니다. 이 정체감이 안정적이라면 스스로를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끼게 되고, 안정적이지 않다면 방황하는 느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1. 적절한 자존감
- 자기존중감 Self-esteem이란 '개인적인 특성과 능력에 대한 태도'입니다.
- 타인이나 사회에서 규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스스로 주관적으로 느끼는 판단입니다. 자신의 실제 특성이나 성취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 스스로 지각하는 '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존감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평가로 봅니다.
- 그렇다면 적절한 자존감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할까요? 먼저 자신의 특성과 성취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심리검사와 해석상담을 받아보거나, 스스로 일기를 써보거나,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서 나만의 특성을 알 수 있겠죠.
-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잠재력과 기회를 얼마나 활용하는지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누적되면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좋은 점이나 싫은 점에 몰두하여 집착하거나(자기애 혹은 자기비난), 자신의 개성을 희생하며 주변 요구에 몰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게 된다고 합니다.
2. 긍정적인 자기관여
- 자기관여 Self-regard란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여러 태도들, 긍정/부정적인 태도들로 구성된 복합체를 의미합니다.
- 자존감에 비해서는 현재 진행되는 사건과 상황의 변화에 민감한 측면입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기애적인 사람이 전반적으로 우월감이나 권리를 주장하지만(과장된 자존감), 어떤 실수에 대해서 자책하고 자기비난적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상황적인 자기관여). 이렇듯 자기관여가 완전히 긍정적이고 부정적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식의 자기관여가 적은 경우, 혹은 특정 능력, 특성에 대해 타인과의 비교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부정적인 자기관여가 반복되고 만연하게 되면 자존감의 저하로 이어집니다.
- 자존감이면 됐지 상황적인 자기관여가 왜 중요할까요? 대체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을 텐데, 센스 있는 유머감각에 있어서 만큼은 자꾸 비교를 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어떨까요? 이렇듯 자존감은 적절하지만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가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임상심리 영역에서는 이렇게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상담의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됩니다.
3. 충분한 자기의식
- 자기의식 Self-reflection이란 자신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볼 수 있으면 자기인식이 늘어나고, 안정적인 정체감에 도움이 됩니다. 이런 자기의식, 즉 성찰 introspection 수준이 높을수록 1)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인식하고, 2)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민감하고, 3)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인상을 점검한다고 합니다. 너무 거창하고 크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3가지 요인이 충분하게 이루어지는 게 건강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나는 셋 중에서 어떤 부분을 보완하면 좋을까요?
- 반대로 자기의식이 부족하다면 1) 자신에 대한 부정확한 혹은 과도하게 긍정적/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2)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3) 자신을 비판적 검토하고 스스로 행동을 바꾸지 못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자기의식은 심리상담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작업을 통해 향상될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에 대해서 일기를 쓰면서 언어로 구체화해보거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타인의 피드백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정적인 정체감 = ' 적절한 자존감 + 긍정적 자기관여 + 충분한 자기의식 '의 조화!
*로르샤하 검사로 알아보는 '나'라는 사람
1. 정체감, 너는 정체가 뭐니?
5. 편안한 대인관계를 위한 조건들 (next)
참고한 책들
Irving B. Weiner <Principles of Rorschach Interpretation (로르샤하 해석의 원리)>
John E. Exner <A Rorschach workbook for the comprehensive system (로르샤하 종합체계 워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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