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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Apr 26. 2021

[소설] 이십대 여자, 기자 (1)

연재소설 제 1화

1#       

   

테이크아웃 할인하는 커피숍에 들려 따뜻한 커피를 캐리어에 담아 오른손에 들었다. 왼쪽 어깨에 숄더백을 메고, 한 손으론 취합한 자료 용지를 들고 걷느라 손이 바빴다. 삼거리 횡단보도를 걷는데 왼편에서 우회전하는 차량이 거침없이 돌진하는 바람에 내가 뒷걸음질만 안 쳤어도 치일 뻔했다. 다행히 차량은 가까스로 내 발 앞에서 멈췄지만 취합한 자료 여러 장이 떨어지고 커피가 흘러내려 버렸다. 스타킹에 진한 커피의 흔적이 화끈거렸다. ‘젠장.’ 흰색 스니커즈까지 커피가 흘렀다. 온갖 짜증을 담아 ‘으악’하고 소리 질렀다.    


운전자는 차를 돌려 갓길에 세우더니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냐는 뻔한 말. 나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차를 돌렸단다. 차에 치인 건 아니지만 차량이 모른 척 도주했다면 가만 안 있었을 거다. 번호판을 적어 경찰서 교통계장과 커피 한잔하며 사건 마냥 양념 쳐가며 이 일에 대해 하소연했을 거다.     


운전자는 엉망이 된 커피 캐리어와 내 다리를 꼴을 바라보더니 연신 괜찮으냐고 물었다. 커피값과 스타킹값, 신발세탁비용, 상비약 정도를 보상해주고 싶다고 횡설수설에 가깝게 연락처를 물었다. ‘운전습관은 나쁜데 정상적인 인간이네.’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가보세요. 저도 갈 길 갈게요.”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운전자를 등지고 한지웅 선배 아지트로 갔다. 커피 자국으로 얼룩덜룩해진 커피잔을 나눠주고 나도 한 잔을 마셨다. 취합한 내용을 책상에 주제별로 나눠 올려놨다. 오전 시간이라 다들 보도자료 다루기 바빴다.     


“여기서 인스턴트커피 타 먹으면 되는데 번번이 고마워요. 한 기자.” 이동우 선배가 커피에 설탕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홍 선배도 거들어 얘기한다. “한 기자. 요즘 타 먹는 커피도 맛있는 거 많다던데 추천해봐. 내가 사무실에 맛있는 거로 주문해 놓을게. 에스프레소 커피가 다 맛있는 게 아니야. 사오는 것도 수고스럽고.” 홍 선배는 다른 사람보다 섬세한 면이 있다. 부담스러우니 사오지 말라고 말하기보다 적절한 대안을 내놓으며 듣는 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네. 요즘 여행 가서 자주 사온다는 커피도 괜찮던데, 인터넷으로 사면 시중 커피보다 저렴할 거예요.”


“그래? 요즘 에스프레소 자판기 커피도 흔하던데. 그런 거 들여놓을까?” 홍 선배가 커피 이야기를 이어가자 이 선배가 끼어든다. “관리가 잘 되겠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자판기까지는 필요 없겠죠. 밖에서 차 마시는 경우가 더 많은데.” 내가 대답했다. 자판기를 진짜 들여놓으면 부담스럽고, 관리도 골치 아프다. 홍 선배도 그냥 한 말일 거다. 매일 아지트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아지트로 꾸려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다들 ‘그러네.’라며 동의하는 듯 넘어갔다.    


나는 회사로 출퇴근하지 않아서 일명 아지트에 끼어 일할 때가 많다. 아지트는 홍 선배의 사무실인데 김태일과 이동우 선배도 아지트에 와서 일한다. 나를 포함해 각자 다른 회사지만, 대개 정보공유, 일 분담, 편안한 장소 제공 등 여러 장점을 이유로 아지트를 찾는다.    


아지트는 홍 선배를 주축으로 모여 있고, 연령도 경력순으로 높아 서열이 잘 잡혀있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회사이기에 같은 공간 속에서 긴장과 부담이 덜하다. 가장 막내인 나도 큰 불편함 없이 지낸다. 물론 막내로서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가 있다. 평소에는 신경 안 쓰지만, 아침에 모여 있을 땐 커피를 타서 선배들에게 돌린다. 자잘한 현장취재는 내가 다 나가는 편이라 선배들은 현장정보를 공유받을 때도 많다.    


그래도 김 선배와 이 선배는 나와 현장에 동행할 때가 많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인데 그렇다고 해서 셋이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서로 성향이 도드라지다 보니 내심 뒤에서 못마땅하다. 아마 선배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일하면서 모두동의하는 사례를 찾기 힘든것 보면 그렇다.     


어제 경찰청에서 조사한 정보를 취합하느라 오후를 보냈다. 간 김에 선배들이 들리라는 부서도 들리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 분류해 뽑아왔다. "한 기자야. 2007년부터 현재 통계랑 2006년 전 5년 치 통계 비교 분석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왜 그냥 통계로만 뽑았어?" 김 선배는 부탁한 사람치고 말투는 나를 가르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통계가 눈에 잘 들어오게 나와서요. 선배야 딱 보면 아시잖아요. 아, 그래프 ppt 필요하면 말하세요. 샘플 있으니까 살짝 고치기만 하면 돼요."     


"그래. 내가 어떤 기사 쓰려는지 알겠지? 이번에 보고 배워둬." 김 선배는 나한테 언제나 직속 상사처럼 구는 버릇이 있다. 물론 일적으로 도움이 될 때가 많은데, 매사에 '나는 다 알아' 식으로 거들먹거리곤 해서 마냥 좋은 선배는 아니다. 그래도 김 선배 소개로다음 주에 경찰청 정보과 직원과 식사하기로 했으니 그전까진 낭랑하게 구는 게 좋다. 특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불편한 기색이라도 티 나면 당분간 아쉬울 게 뻔하다. 괜히 담배 피울 때마다 '그래도 내가 인적 네크워크 해주잖아. 그치?'라고 떠드는 게 허세만은 아니니까.    


점심때가 됐다. "오늘 다들 점심 어때? 약속 있는 사람 있어?" 홍 선배가 말했다. 내가 먼저 "저 이것만 하고 점심 나가봐야 해요. 우리 부장이 시킨 거 하러 부속병원 가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김 선배도 은행 간다고 겉옷을 차려입으며 일어났다.    


홍 선배가 "아 그럼 동우는? 둘이 먹지 뭐."라고 말이 끝나니 김 선배는 바로 나갔다. 나도 대강 테두리 잡은 기사를 저장해두고 노트북을 끄고 립스틱을 챙겨 바르면서 선배들이 먼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문자 메시지)

- 도시락 샀어? 내거 빅사이즈로.

- 어 샀어. 302호로 와.    


점심약속장소를 확인 차 문자했다. 점심과 디저트까지 먹으려면 오래 걸리니까 시간 절약하려고 숙박업소에서 먹기로 했다. '302호...' 벨을 눌렀더니 웃통 벗은김 선배의늘어진 뱃살이 나를 반겼다.    


"밥 먹기 전부터 왜 이런 모습이야? 나 배고파." 잘도 망가진 뱃살을 보니 입맛이 사라져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자마자 왜 이렇게 매섭게 굴어? 땀나서 벗었어." 김 선배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 태도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거 같다. 제 딴에는 날 맞이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다정하게 굴어야겠다.    


"땀 냄새도 좋아." 곁에 다가가 얼굴을 대고 냄새를 맡으니 김 선배가 거칠게 숨을 쉬며 아랫도리를 벗는다. "밥도 안 먹고 하려고?". "아니. 하고 밥 먹고 또 할 거야." 김 선배의 손이 내 옷자락 안으로 들어와 감싼다. 나도 옷을 벗으며 편안히 자세로 누웠다.     


"역시 배고플 때가 더 맛있어. 배부르면 덜 맛있거든." 김 선배 귀에 속삭였다. 둘이서 열심히 뒹굴고 나면 도시락밥도 맛있을 거 같다. 운동 후 밥맛이 더 좋은 법이다. 김태일은 같은 자세로 계속 움직이더니 금세 끝났다. “있다가 또 할 거야.” 빨리 끝난 게 민망했는지 다음으로 만회하려고 한다. 난 사실 금세 끝나고 상관없다.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오붓한 때가 아니다. 일하는 중간에 와서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데 간단한 게 낫다. 빠르고 간단한 관계로 버자이너를 시원하게 마사지해 준 기분이면 족하다.    


몸을 씻고 도시락을 열었다. "넌 항상 그거만 먹더라?" 김 선배는 말할 때마다 부정적인 기저가 깔려 있다. "다른 것도 먹어봤어.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라고 점잖게 설명해야 부정적인 말투가 조금 나아진다.    


"나 있다가 병원 다녀와서 기사 쓰는 거 도와주라. 저번에 선배도 병원 기사 썼었잖아." 이런 자리는 부탁하기가 더 자연스럽다. 거절당할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부속병원? 뭔데?" 김 선배가 답했다. 김 선배가 도와주면 어설프게 해서 부장한테 깨질 염려는 줄었다. 낯선 기사를 작성할 때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난 흔한 사건·사고 기사도 쩔쩔매며 작성할 때가 있다. 노 부장에게 자주 혼나봐서 일을 너무 독립적으로 하는 게 오히려 나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안다.    


"한 번 더 하자." 김 선배가 또 원한다. "안 돼. 이제 활동해야지. 시간을 봐." 낮에 너무힘을 낭비하면 안 된다. 예비전력을 남겨둬야 한다. 김 선배는 욕구가 활발해서 다 맞춰주면 내가 지쳐 떨어진다.     


"그럼 오늘 자고 가. 밤에 기사 쓰는 거 도와주고 하면 되잖아. " 김 선배는 혼자 산다. "글쎄. 우선 밤에 결정할게. 있다 봐." 이 인간이랑 밤을 보내면, 다음날 죽어난다. 말도 많고, 툭하면 땡깡부리기 일쑤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없다. 당연히 김 선배 집에 묵지 않을 거다.    


김 선배와는 아지트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거의 말도 못하고 어려웠다. 그런데 여러 번 식사하고 말이 오가다 보니 묵직한 이미지는 고사하고 매일 변죽을 치는 이 선배에게 당하는 걸 보면 허당기질이 다분하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다른술자리에 있었는데 김 선배한테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문자가 몇 번 오갔는데, '이리로 올래?'라더라. '어라? 이놈이 예고편 없이 들어오네?' 나는 술에 취해서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선배가 일러준 주소로 갔다. 평소에 허당 모습과 꼰대 같은 말만 잔뜩 했던 인간이 그날은 과감했다. 뜬금없이 늦은 밤에 처음 연락해서 나를 부르더니, 만나서도 거침없이 나에게 들어왔다. 각자 술에 취해 있어서 가능했던 밤이었다.  

  

그날, "선배. 말할 경우가 없어서 말 안 했는데, 나 남자친구 있어." 나는 나름대로 상대에게이 순간 이후에 대해선택의 여지를 주는 말이었다. 김 선배는 시무룩해 보였다. 과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게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에 만난 여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며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는 거 같았다. 바람둥이 타입은 아닌 것 같고, 여자 문제로 입이 싼 놈 같지도 않아서 혹시나 하는 당부는 안 했다.    


그 뒤로 김 선배는 며칠 조심스러운 모습이더니, 둘이서 취재 가는 차 안에서 내가 사귀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랑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내가 자길 좋아하게 될 거라고 덧붙였지만, 내 감정이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김 선배와 이미 저질러버린 사이인데 계속 만나는 게 나쁘지 않았다. 낮에는 재수 없는 상대지만, 밤에는 쓸 만한 사람이라 나쁘지 않았다. 지난밤에 김 선배의 여린 마음씨가 느껴져서 승낙한 부분도 있다.        




"당신 조금 있으면 전세 만료되지 않아? 재계약 할 거야?" 보통 남자친구와 주말을 보낸다. 서로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숍은 꼭 간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면서 집 문제를 물었다. 남자친구는 "어. 아마 재계약 해야겠지? 근데 왜?"라고 답했다. "아니, 이사하게 되나.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봤지." 남자친구 집은 몹시 좁다. 어차피 신혼집 시작하려면 이사해야 하는데, 미리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물었다. 지금은 같이 사는 게 아니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네 생각하면 미리 집 옮기는 게 좋지. 근데 부동산 알아볼 시간도 없고. 대출 문제 해결되면 빌라 같은 데 전세로 알아봐서 들어가야지." 남자친구도 염두해두고 있는 게 확실하다. 항상각자 자신만의 공간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말을 한다. 서로 너무 붙어있는 게 좋은 것만이 아니라고.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네서 살지 않는 거다. 남친 집에서 출퇴근하면 우리집 보다 훨씬 수월하지만 지금 시점에 물리적으로 자주 부딪히는 시나리오는 최악의 상황에 가깝다.    


커피를 다 마실쯤 남친이 입을 열었다. "이번 어버이날에 우리 엄마랑 점심 먹자." 남친의 어머니는 여러 번 뵀다. 처음 본 날부터 결혼 얘기를 꺼내시는 탓에 민망했었다. 그 당시 우리는 결혼 얘기가 오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결혼할 사이로 돼버렸다. 어쩌다 이런 약속한 사이가 됐는지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다. 남친 어머니는 초반에는 강한 이미지였는데 거듭해 만날수록 유하게 대하신다. 밥 먹는 시간 정도는 부담 없이 만날만 하다.    


저녁을 먹고 차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밤이 늦었다. 이대로 집에 데려다주겠지. 오늘도 못한다. 그것을. 물론 지금은 피곤해서 딱히 하고 싶진 않다. 그래도서로 피곤하다는 변명으로 점점 뜸해지는 것 같다. 아쉬워서 남친 가슴에 머리를 대고 문지른다."하고 싶다." 품속에서 속삭였다. 남친은 "늦었으니까 오늘은 들어가야지. 또 늦잠 부리지 말고."라고 말한다. 오늘은 말고, 라는 말이 오늘 처음이 아니다. 오늘도 역시 안 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매번 당연하게 밥 먹고 차 마시고 집 가는 게 당연하게 느끼지는 게 싫다. 요즘 들어 이주에 한번 꼴로 주말에 남친네서 잔다. 그 말은 이주에 한 번정도 겨우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이는 정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여느 때보다 좋다. 그런데 왜 관계는 점점 뒷전이 되가는 걸까. 피곤한데 더 복잡하다. 남자친구를 보내고 집에 들어왔다. 일찍 잠들기는 글렀다. 복잡하다. 복잡하다. 짜증난다. 




- 이후 [이십대 여자, 기자.] 2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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