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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May 17. 2021

[소설] 이십대 여자, 기자 (2)

연재소설 제 2화

2#        


일 끝나고 오랜만에 여자들끼리 모였다. 하늘이와 소라와 셋이 만난 게 얼마 만이고, 맘껏 여자만의 수다를 떤 게 얼마 만이던가. 오늘은 주로 야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다들 상기된 표정이다. 먼저 안부를 묻다가 자연스레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대화가 시작됐다. 언제나 근황을 물으며 서론을 시작하는 게 가장 쉽다. 하늘이는 병원 코디네이터로 일하는데, 이번에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병원이면 주 6일 일하니? 얼마나 벌어?" 소라가 물었다. 하늘이는 이제 월급이 오른다면서 155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소라는 "주 6일 일하는데 그래?"라고 말하니 하늘이가 "그래도 주에 두 번 정도는 짧게 일해."라고 답했다.    


소라는 염려꾼, 왕언니로 돌변해 설교를 시작했다. "하늘아. 너는 중국어도 잘하잖아. 그거 살려서 다른 일 하던지. 더 배워서 높은 급여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애가 왜 그러니. 잠깐 병원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간호조무사 자격증까지 따고. 너 계속 간호조무사나 할 거니?"     


소라의 말을 듣고 하늘이가 당황한 거 같다. 나도 당황했다. 하늘이는 "우선 해보는 거지. 내가 중국어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말 끝을 흐리는 하늘이의 말을 소라가 매섭게 받아쳤다. "간호조무사 학원 다니느니 차라리 중국어학원 다니면서 실력을 향상했으면 얼마나 좋아. 더 공부해서 시험 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어렵지 않은 일도 많잖아. 관광객 상대로 가이드 해도 되고. 네 시간도 자율적이고 얼마나 좋아." 할지도 모르는 직업까지 염려해준다. 하늘이가 사무실에서 직장생활 할 타입은 아니다. 성향을 고려해 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알겠다. 하늘이가 잘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말한 것도 느껴진다. 그런데 예전부터 소라는 하늘이를 어리게 얕잡는 태도가 있어서 좋은 의도에서 하는 말이라도 수용하기 좋은 비판이 되지 못한다. 결국 하늘이를 미련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된다. 하늘이도 우리와 같은 성인인데, 자기앞가림은 알아서 하고 있단 걸 소라는 아직 인정이 안 되나보다.    


"하늘아. 너도 남자친구랑 계속 만나지? 요즘 어때? 여전히 달달하고 좋아?" 이어지는 염세적이고 부실한 비판에 참을 수 없어서 다른 화제를 열었다. 서로 남자친구와 이야기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하늘이는 "남자친구가 같이 살자는데, 난 좀 벌써부터 그러는 거 싫어. 내 생활 전반이 더 관섭받게 될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소라는 "남자친구가 너 놓치기 싫은가 보다. 그래도 역시 동거하는 건 네가 너무 아까워서 안 돼. 그러다가 자연스레 결혼으로 발목 잡히면 어떡해."라고 받아쳤다. 또 염려꾼이 발동했다.     


나는 동거에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하늘이 네가 첫마디부터 동거하기에 자신 없는 표현을 한거 보니 안 하는 게 낫겠다. 물론 나도 예쁜 네가 더 아까워." 소라보다는 좋은 말씨와 뉘앙스를 전달하고 싶었다.


"맞아. 너 얼마나 인형 같아 보이는 지 알아? 교정하니까 양악한 거처럼 더 갸름해지고 얼굴도 워낙 작아서 전체 비율도 좋아." 소라가 말했다. 드디어 서로 외모 찬양에 진입했다. 뻔하고 오버하는 발언도 서슴치 않지만, 칭찬이 즐비하니 기분이 좋긴 하다. 각자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다. 자존감이 낮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위로하는 온갖 포장된 문장이 난발한다. 그런 상황은 좋은 말하면서도 마치 처음부터 단물 빠진 껌 씹는 기분이다.    


"관계는 어때?" 소라는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오빠는 내가 만나 본 남자 중에 제일 커. 이제 작은 남자는 못 만날 거 같아. 게다가 그걸 얼마나 잘하는지. 진짜 그쪽 분야에서 난놈이야."    


나는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이거보다 커? 이 정도가 참치김밥 굵기거든."이라고 물었다. 소라는 "더 큰 거 같은데? 모르겠다. 다음에 손가락으로 잡아서 확인해봐야지."라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보다 크면 스페셜 김밥이야. 흑인이냐?" 소라는 손가락이 생각보다 얼마나 긴지 모르거나, 섹시모드로 돌입 시 특정 돋보기가 장착되는 게 분명했다.     


하늘이를 보며 "네 남친은 장점이 뭐야?"라고 물었다. "우리 오빠는 아주 크진 않아. 근데 서로 익숙해지다 보니 만족감도 올라가고 점점 노골적이고 자극적으로 하게 돼. 초기보다 지금이 더 좋아!"라고 답했다. 말하면서 소라를 의식한 거 같다. 소라 남친 물건이 크다는 말에 진짜 기가 죽은 거처럼 말이다.    


내가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제마다 매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 크기가 장점이 될 수는 있지만 중요한 요소는 나와 잘 맞는 모양과 마찰, 그리고 호흡이야. 서로 박자가 맞아야 차지거든."이라고 말하자, 소라는 툭하면 내가 이 소릴 한다면서, "작은 것과 큰 것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큰 거 고를 거잖아."라고 말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다만 이분법으로 좋은 것과 아닌 것을 나누는 게 싫은 거다. 실전에서 느낌과 좋은 이유 모두 이분법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관계는 여러 가지 조건이 복합적으로 좋은 상태일 때 더 아름다움을 느낀다.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상태"가 더 적절하다. 단단하게 선 상태, 설레고 야한 분위기, 달아오른 체온, 상대의 좋은 냄새, 사랑의 정도, 몸짓이 엉키지 않고 흐름이 잘 맞는 것, 기술적인 훌륭함, 상대에 대한 이미지가 종합적으로 매력적임, 매우 원하는 상태일 등 좋은 관계의 조건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적절한 상태이다.     


실제로 큰 것과 작은 것에서 크다고 항상 만족도가 높지 않았고, 작다고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잘 맞는 상대도 있지만, 여러 차례 서로의 몸을 알아가면서 심리적, 육체적 만족도가 향상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디테일을 빼놓고 단편적인 이야기만 흘러가는 게 못마땅하기도 하고, 디테일을 열변하다가 ‘나라고 그걸 모르겠니?’라는 반응이 나올까 봐 자신 있게 디테일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모두 오랜만에 여자만의 수다가 반가운 모양인지 원래 티타임하고 파하기로 했는데, 아쉽다며 술 한잔하자고 나를 졸랐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 부담스러웠지만, 한 시간만 있자는 제안이 강제 합의에 가까웠고 새끼고양이같이 영롱한 눈을 보고서 거절할 수 없어 술자리로 옮겼다. 분위기는 더 재미났다. 한 시간만 마시자는 말이 무색해진 채 더 아쉽다며 2차로 포장마차를 갔다.     


술에 취하니 하늘이가 말이 많았다. 하늘이는 예전에 잠시 실어증에 걸린 적이 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는데 그러다 괜찮아졌다. 그때 얘기를 지루할 정도로 해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임신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실어증에 걸렸다고. 병원에 가도 원인을 못 찾고 뾰족한 치료법도 없다가 나아진 거 보니당시 예상치 못한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처음 듣는 사연이었고, 갑자기 이렇게 무겁고 진지한 주제가 튀어나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잘 챙겨주지 못한 게 죄책감이 들면서 하늘이가 걱정됐다. 그런데 소라는 원래 알고 있었나 보다. 관심 없는 태도를 넘어 그만 말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물론 포장마차 분위기가 참 밝고 조용한 편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말이 어울리지 않고,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게 신경 쓰일 만도 했다. 아무리 분위기가 그래도 우리 테이블만의 분위기는 따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소라의 태도가 못마땅하면서 하늘이가 계속 염려됐다. 그래서 하는 말을 모두 진정으로 듣고 싶었다.     


소라가 하늘이를 무시하듯이 나도 소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이와 대화했다. 그 와중에 나라에게 연락이 왔는데 소라가 통화에 끼어들어 이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통화를 이어나가는 소라는 자세까지 다른 방향으로 틀어 앉았다. 나도 하늘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했다.    


“솔직히 우리 나이도 젊고, 지금 상태로 임신을 유지할 형편도 안 돼. 오빠와 잠정적으로 결혼에 대해 말이 나왔던 상태지만 임신해서 결혼하고 싶진 않았어.”


“그럼 임신 중단에 대해 많이 고민하진 않았던 거야?” 하늘이가 애를 낳은 것도 아니고 임신 중단했다고 직설하진 않았지만, 우회적으로 임신중단했다는 암시를 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힘들었는지 유추하기 위해 물었다.


“고민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잠시였고 중단해야 했어. 지금 오빠도 나도 경제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데 애를 낳고 어떻게 키워. 그리고 난 벌써 애 엄마가 되기 싫어.”


“맞아. 나도 그런 상황이면, 아니 지금이어도 임신중단할 거야. 아직 공부하고, 무엇을 더 준비하고 즐길 때야. 벌써 애 엄마 되고 고생하고 결혼해서 남편 맞춰 살 생각하면 끔찍해. 아이 낳으면 현실적으로 공부니 꿈이니 무기한 연기되는 거야.” 소라가 하늘이 말을 받아쳤다.
 

그녀들의 말과 사정을 다 이해한다. 현재(2017년) 우리나라 형법에 의해 낙태를 불법이다. 하지만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한계가 정해져 있다.    


[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하지만 이러한 허용한계가 현실적이지 않다. 법에 의하면 뇌가 없는 태아의 경우도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했다 해도 신고 등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신중단을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기준을 정해야 하는가. 모자보건법의 허용한계만으로는 현실적으로 합법적 임신중단은 거의 어렵다.     


누가 주체가 되고, 누구에게 중요한 법인가. 심각한 장애를 지닌 태아를 임신중단하지 못하고 힘든 임신기를 지나 출산하고 장애로 인해 숨을 거두는 신생아를 보내야 하는 모든 고통을 강제로 여성이 짊어져야 한다. 현행법을 준수하려면 생사를 희생해야 한다.    


임신중단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키울 형편이 안 되거나, 태아가 산모를 직접적인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아도 임신 자체가 죽을 만큼 힘들어 포기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밖에 임신출산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도 현행법에 의하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모든 생리적 고통, 심리적 고통, 사회적 고통 오롯이 개인이 부담한다. 그리고 불법낙태를 하더라도 불법이라는 것과 사회적 편견에 심리적 고통은 가중된다.    


종교적, 신념적인 이유로 임신중단을 반대하기도 한다. 생명이 소중한데 낙태가 금지라는 건, 태아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건가. 임신한 여성의 생명과 인격, 인생은 소중하지 않은 걸까. 둘 중 우선돼야 하는 존재는 당연히 태아가 아니라 모체인데 말이다.    


나는 하늘이가 얼마나 고통으로 시간을 보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녀라고 태아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을까. 하늘이도 여느 여자들처럼 자신이 아이를 갖고 낳아 기르는 엄마의 모습을 아름답게 상상해 봤을 거다.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중단을 상상하지 않았을 거다. 쓸데없는 자책도 많이 했을 거다. ‘왜 그때 잘 챙겨 먹던 피임약을 이틀이나 깜박했을까.’라던지, ‘나는 왜 아직 어리고, 돈도 없고, 안정되지 못한 걸까.’라는 바보 같은 자책과 스스로 갉아먹는 자기연민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화가 나고 속상해도 탓할 대상도 없이 스스로 모든 상처를 삼켰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현실을 살아가야 했을 거다. 속절없는 상황에 그저 정신 차리고 다시 일하고 돈을 벌고, 일상을 되찾는 게 그러니까 삶을 이어가는 거다. 마음의 휑해도 우울함에 빠져 병들지 않으려 노력했을 거고, 이 고통이 멈추기를, 또 기쁜 일도 생기기를 바랐을 거다.    


“지금은 심리적으로 어떠니. 견딜 수 있는 거야?”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게 극복하는 거다. 하늘이는 그래도 괜찮아 보이긴 하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이제 괜찮아. 그냥 그때 나는 너무 아팠어. 몸도 마음도. 그때 아픈 걸 극복하는 게 먼저였어. 지금은 잘 말하고 있잖아.” 하늘이는 임신했던 경우는 별로 중요하게 말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억제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그때 실어증에 시달린 게 더 큰 위기였던 거 같다. 크게 앓았던 하늘이가 조금 가엾고, 잘 극복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어차피 이 순간 나는 겨우 그녀의 지난 심정을 짐작할 뿐이다.    


“안아주고 싶다. 고생했어. 많이. 이제 혼자서 앓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귀 기울이고 어깨도 빌려주고 술도 같이 마실 거야.” 하늘이 손에 내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심리적인 격려 정도다.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하늘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 속사정은 알 수 없다. 그저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하늘이를 이해하고 감정의 온도를 맞추고 친구로서 또는 인간적으로 정서를 함께해주고 싶을 뿐이다. 하늘이가 어려운 말을 꺼내고서 수치스럽지 않도록. 작은 해소나 위안이 되도록 친구로서 인간적으로 함께 할 뿐이다.  

  

붉어진 눈가로 나를 바라보는 하늘이에게 정서를 환기시키려고 말을 꺼낼 때, 나라가 도착했다. 우리에게 엉켜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가다듬은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 중이었느냐’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하늘이 전에 아파서 병원 다니고 했을 때 얘기하고 있었어.” 소라가 먼저 대답했다. 나라는 “맞다. 하늘아. 그때 같이 병원 못 가줘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 지금은 괜찮은 거지?”라고 말했고 덕분에 습하고 갑갑했던 분위기가 다소 시원해졌다.    


나라가 와서 분위기는 빠르게 밝아졌다. 




- 이후 [이십대 여자, 기자.] 3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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