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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여행자 Apr 17. 2019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탈리아, 파도바 : 감정을 내뱉을 줄 아는 사람이 더  용감한 거야


이탈리아 베니스의 운하


마카오에 있는 베네시안 호텔에 가본 적이 있다. 호텔 내부 장식은 이탈리아의 베니스란 도시를 본뜬 거라고 했다. 새하얀 다리 밑에 거대한 운하가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매끈하게 빠진 곤돌라(베네치아 시내의 운하에서 운항되는 배)가 유유자적하게 지나간다. 곤돌라를 운항하는 뱃사공은 노를 젓는 박자에 맞추어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그래서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면 꼭 베니스에 가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베니스는 전 세계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여름 성수기철을 맞아 숙박비가 껑충 뛰어올라 있었다.


그때 근교 도시인 파도바에 살고 있는 마테오에게 카우치서핑 초대 메시지가 왔다. 파도바와 베니스의 거리는 기차를 타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배낭여행자에게 선택지란 없으니 기분 좋게 승낙했다.


베니스에서는 곤돌라를 타고 도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인기이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파도바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베니스는 비가 오면 운하의 물이 넘쳐 관광이 어렵다. 아무래도 파도바를 즐기라는 계시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에는 마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곱슬끼가 심한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어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 같은 느낌이었다. 


차를 준비하는 마테오


집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준다. 이제는 서로를 파악할 시간이다. 마테오는 내가 여행한 지 아홉 달이 지났다고 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나는 그의 직업이 기타리스트가 아닌 심리치료사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영국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재원이었고 현재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차를 마시고 난 후, 우리는 함께 파도바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원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도시는 아니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 그런지 더욱 조용하다.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등 알록달록한 색들로 칠해진 건물들 사이로 정갈한 자갈길이 깔려있다. 곳곳마다 눈에 띄는 벽화도 인상적이다.


파도바를 걷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벽화들
비가 내리는 이탈리아 파도바의 광장


광장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마테오는 커피 한 잔을 하는 게 어떠냐며 진한 이탈리아 커피의 맛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걸어가는데, 하늘색 남방을 풀어헤친 금발머리의 남자가 아는 척을 해온다. 유럽인들은 외모에 비해 실제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품은 남자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어린 티가 난다.


“헤이, 마테오! 어디가?”
“오, 안녕. 커피를 마시러 가는 중이야. 요즘 잘 지내지?”
“물론이지. 다음에 또 보자고!”


짧은 인사였지만 잠시 날씨 때문에 우중충하던 거리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딱 스쳐 지나간 남자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그는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걸어가버렸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자살 시도를 했었어.”


“응?”
“아까 지나간 그 남자. 내담자였거든.”


충격적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것에서 한 술 더 떠 한없이 밝아 보이는 인상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어쩌면 어두운 면을 감추기 위해 밝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스스로를 포장한 걸까.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을 씻어내지 못한 채 카페에 도착했다. 마테오를 따라 유명하다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한 잔을 시켰다. 에스프레소 위에 동동 떠있는 우유 거품이 포근해 보인다. 혹시나 뒷맛이 쓸까 봐 초콜릿까지 함께 내어준다.


초콜릿과 함께 나온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마테오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매번 다른 문제를 마주한다고 했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진로에 관한 고민, 이성친구와의 관계 등.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문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한없이 밝아 보인다는 거다. 아까 스쳐 지나갔던 남자처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내가 그랬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모진 말이 가슴에 박혀 회사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울다가도, 행복하지 않은 삶에 신물이 나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조차도. 사람들 틈에서는 항상 분위기 메이커였지만 혼자 있을 때는 언제나 고독한 외로움에 허덕였다.


“마테오, 나 그 아이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아. 내가 그랬거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지금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게 무서웠어.
혹시라도 나약해 보일까 봐. 나의 능력 없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봐.
남들은 잘만 살아가는데 사회의 부적응자처럼 보일 것 같았거든.”


마테오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리고는 커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이탈리아의 커피는 한 입에 털어 넣기 좋은 크기이다.)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꿈틀 하더니 이내 초콜릿을 까서 입에 집어넣는다.


알록달록한 베니스의 집


“영은, 항상 나와 상담을 하는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어.


힘이 들 때는 힘들다고 말해도 돼.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내뱉을 줄 아는 사람이 더 용감한 사람이야.


난 진한 커피를 사랑하는 이탈리안이지만 역시나 에스프레소는 써. 이렇게 바로 초콜릿을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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