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뛰어〉에 담긴 우리들의 모습

A급처럼 보이고 싶지만 사회는 B급

by puree


“내가 정한 길로 뛰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블랙핑크의 "뛰어"는 흔히 떠올리는 K-POP의 틀을 일부러 벗어났다.

현란한 무대, 세련된 영상미, 멋지게 웃는 모습 대신,

오래된 골목과 투박한 배경,

그리고 무표정으로 달리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장면들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블랙핑크가 뛰어가는 곳은 ‘피아노 학원’과 ‘부동산 골목’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과 평가를 강요받던 공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분과 계층을 가르는 부동산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결국 자신의 아이에게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KBS 다큐멘터리에서

“기득권은 절대 공교육이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도대체 무얼 위해, 누구를 위해 사교육을 하는 걸까?

결국 평가는 그저 핑계일 뿐, 우리가 그들이 만든 제도에 길들여져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동인권선언문조차 지켜지지 않는 나라.

아이들이 좀처럼 행복할 수 없는 나라.

계급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교육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사교육이 계급을 만든 걸까. 어느 쪽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우리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정말 행복해진 걸까.


사실 <뛰어>의 진짜 창작 의도나 배경은 알 수 없다.

다만 예술 작품을 내 시선으로 해석해봤을 뿐이다.

평소에는 선뜻 글을 써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블랙핑크의 <뛰어> 덕분에 용기를 내어 몇 자 적어본다.


<뛰어>는 한국 사회가 숨 가쁘게 달려온 교육과

부동산 중심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춘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달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알 수 없는 무감각, 무뎌진 감정이 불안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이 영혼 없는 좀비 같다거나, 혐오스럽다고까지도 한다.


이 모습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번아웃과

SNS 속 무표정한 자아, 감정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영상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불편한 기분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촌스럽다.”

“퀄리티가 떨어진다.”

“B급 같다.”


하지만 정말 그게 실패한 미학일까?

이 불편함이 오히려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 같다.

우리는 수없이 ‘A급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닳고 마음은 지쳐갔다.


<뛰어>는 그런 감정의 민낯을 숨기지 않는다.

무너진 감정과 질서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답 없는 질문을 안고 달리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 곡의 프로듀서가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 구조를 뉴스와 콘텐츠로 접한 사람이어서

오히려 더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관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외면했던 현실을 그들은 예술로 드러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며 조금이나마 더 건강하고 나은 내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K-POP은 세계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지만,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는 좀처럼 드물었다.

<뛰어>는 그 한계를 과감하게 뛰어넘는다.

사회와 자기검열의 벽을 넘은 용기, 불편함을 감수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뮤직비디오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선언처럼 느껴진다.

“나는 남들이 가는 그 길을 따르지 않겠다.”

“나는 내가 정한 길, 그 길 위에서 진짜로 뛰겠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저 살아남으려고’ 달려온 게 아닐까.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각자의 방식대로 어떻게든 버텨왔던 것이다.

때로는 그 무표정한 달리기도 하나의 생존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잠깐 멈춰 서서,

‘나는 왜 뛰고 있는 걸까’를 서로에게 물어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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