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또라이
전화벨이 울린다. 사무실에 점장님과 사장님이 있지만 아무도 받을 생각을 안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 바퀴를 굴려 전화기 가까이에 갔다.
“OO마트입니다.”
“야, 여기 OO인데 이걸 물건이라고 보냈어! O발, 내가 만만해 보이냐, 이딴 식으로 할 거면 그만둬.”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거래처 OO이다. 배달 온 물건이 맘에 안 드는지 쉬지 않고 욕과 숫자(18)들을 쏟아낸다. 이 정도면 욕사전을 편찬해도 될 정도다.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들렸는지 점장님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는 손짓을 한다. 귀에서 전화기를 조금 떼고 목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야, 듣고 있는 거야? 왜 대답이 없어!”
“네, 사장님, 바쁘실 텐데 많이 속상하시죠?”
“지금 속상한 게 문제야?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곧 손님 들이닥칠 시간인데 이런 걸 보내고 O발, 장사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죄송해요. 매장에서 바쁘다 보니 실수를 했나 봐요. 주문하신 물건 확인해서 싱싱한 걸로 다시 보내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이럴 땐 일단 수그리는 게 상책이다. 같이 받아쳐봐야 소용이 없다. 특히 발주량이 많은 큰 거래처 앞에서 우리는 무조건 ‘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욕을 듣고 무시를 당하지만 그건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마트 직원을 무시하는 거니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 고객을 상대하려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길이다.
“사장님, 물건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근데 목소리가 좀 다르신 것 같은데 혹시 몸 안 좋으세요?”
“O발, 지금 내가 몸이 좋을 수가 있겠어? 일을 이따구로 하니 스트레스받아서 죽겠구만.”
“그래도 몸 챙기셔야 해요, 사장님이 저희 마트 VIP인 거 아시죠? 제가 박카O 따로 챙겨서 보내드릴 테니 드시면서 하세요.”
“그래? 다음엔 제대로 된 걸 보내. 이러면 장사를 할 수가 없잖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걸 보니 이제 된 것 같다.
“네, 사장님. 다음엔 제대로 확인해서 좋은 걸로 보낼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귀를 깨끗한 물에 씻고 싶다. 욕과 비속어로 동서양의 화합을 이루어내는 놀라운 일은 빨리 털어내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다. 모두들 상냥하게 통화를 끝내는 내게 멘털이 갑이라고 하지만 사실 난 유리멘털이다. 다만 내 멘털을 감싸고 있는 자존감이 철갑일 뿐.
귀도 씻고 멘털도 잡을 겸 야옹이에게 갔다. 간식을 흔들자 집안에서 그루밍 중이던 야옹이가 기지개를 켜며 다가온다. 조용히 다가와 살며시 기대고 고롱거린다. 귀여운 녀석, 간식을 핥아먹는 야옹이를 보니 마음의 요동과, 귀의 이명이 사라지는 듯하다. 한참 야옹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거래처 사장님이 날 보고 있다.
“안녕하세요. 무슨 볼일이라도.”
“아니에요, 여기서 고양이 보고 계시길래 궁금해서.”
멋쩍게 웃는 그에게서 순수한 호의가 느껴진다.
“고양이 좋아하세요?”
“아니요, 사실 고양이 무서워해요. 애는 좀 귀엽네요. 아직 어린가 보죠?”
“네, 어미에게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나 봐요. 마트 주위를 서성이기에 간식주다 이렇게 간택되고 말았어요.”
“간택이요? 이 녀석 보는 눈이 있나 봐요. 좋은 사람을 잘 간택했네요.”
그 분과 나는 그렇게 야옹이와 함께 이야기를 했다. 말이 잘 통하는 다정한 사람인 것 같다.
그녀가 주차장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뭔가 바라보고 있다. 살며시 다가가 바라보니 아직 어린 듯한 고양이에게 간식을 주고 있다. 고양이, 그 특유의 눈동자로 날 바라보면 괜히 무서워서 도망가곤 했는데 여기서 보니 나름 귀엽기도 하다. 고양이를 만지는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마터면 그 눈빛에 깜짝 놀라 도망갈뻔했지만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닌 척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준다. 그렇게 그녀와 고양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이 아닌 사적인 대화는 처음이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가 말한다.
“혹시, 좋은 일 하나 하시겠어요?”
“좋은 일이요? 좋죠.”
“그럼 야옹이 사료 좀 기부해 주시겠어요? 애가 생각보다 많이 먹어서요. 사장님에게 좋은 일 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를 준다며 활짝 웃는다. 참 당당하다. 내게 뭔가를 주어도 모자란데 나보고 기회를 준다는 그녀의 당당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에는 고양이 사료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