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지구과학 이야기, 도쿄 시리즈
우리나라에 있는 고급 일식집 이름 중 가장 흔한 것이 아마도 긴자(銀座) 일 것이다. 왜냐하면 긴자는 도쿄의 전통적인 비싼 상업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 전까지 도쿄의 최고급 요정, 클럽에 각종 문화산업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긴자라는 이름은 고급의 대명사가 되었고 요즘은 여기저기에 긴자가 들어가는 상호나 브랜드를 쉽게 볼 수 있다.
현재의 도쿄 긴자는 주오구(中央区)에 동북에서 남서방향으로 교바시 쪽 1초메(丁目)에서 신바시 쪽 8초메(丁目)에 이르는 1km의 거리이다. 중심은 히비야선 긴자역과 와코백화점이 있는 4초메 교차로이다. 고급 상업지의 대명사로 온갖 종류의 고급 브랜드와 고급 브랜드가 되고 싶은 브랜드가 모여 있고 백화점이 밀집되어 있다. 맥도널드도 일본 1호점을 긴자에 냈고, H&M, 스타벅스와 애플도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으로도 유명하게 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긴자는 건물이 오래됐고 옛 고도 제한으로 56m까지 밖에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 많이 들어서는 부도심에 비해 복잡하고 지저분하기도 하고 좁다. 어쨌든 아직까지 동경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름이 긴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래서 이름이 은의 자리, 긴자(銀座)일까?
오늘날의 긴자가 틀을 갖추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1868) 직후인 1869년과 1872년에 일어난 긴자 대 화재 이후이다. 정부는 긴자 일대가 소실되자 대폭적인 구획정리를 시행하였다. 일본 최초의 철도인 요코하마-도쿄선의 종착지인 신바시와 일본 경제의 전통적인 중심가인 니혼바시 사이에 문명개화의 상징 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건축가인 토마스 워터스(Thomas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조지안 양식의 벽돌건물거리(煉瓦街, 렌각하가)인 긴자건설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연속식 소성 가마인 호프만(Hoffmann)식 벽돌 가마(Ringofen)도 설치하였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 1877년에 중단하게 되고 입주비를 감당하지 못한 원주민은 쫓겨나고 지방의 부호들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하지만 이 벽돌건물은 도쿄의 지진에는 별 효용이 없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다수의 벽돌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기존의 목조 건물은 지반이 흔들리면 집도 흔들리며 진동을 흡수하는데 반해, 벽돌 건물은 횡압력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 건물이 튼튼한 줄 알았던 일본 사람들은 결국 잔해에서 수거한 벽돌을 재활용하여 도고시(戸越)의 상점가 바닥을 까는 신세로 전락했다. 여기를 ‘도고시 긴자(戸越銀座)’라고 불렀는데 이때부터 온갖 도시의 긴자거리의 효시가 되었다.
긴자의 이름은 한자로 은좌인데, 이렇게 이름 붙은 이유는 이곳에서 은화를 주조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에도 막부(1603~1867)가 시작된 직후인 1612년에 지금의 긴자 지역에 은화 주조소(銀貨鑄造所)가 만들어졌다. 이 주조소는 원래 순푸(駿府, 현재의 시즈오카시)에 있었으나, 1612년(게이초 17년)에 에도로 옮겨지면서 그 이름이 지명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에도에는 금화를 주조하던 킨자(金座)도 있었고 , 교토, 오사카, 나가사키 등 다른 도시에도 긴자가 있기는 했는데, 수도 프리미엄으로 에도의 긴자가 가장 유명하고 활기찼다. 참고로 킨자는 현재의 니혼바시에 있는 일본은행자리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은화주조소가 무슨 대장간 같은 곳은 아니었고, 일정 크기와 성분량으로 구분하여 만든 은조각에 망치로 각인을 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무게가 생명이기 때문에 저울로 조심스럽게 무게를 측정하고 있다. 은광이 에도에서 멀리에 존재했기 때문에 재련한 은괴 등을 실어날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화폐의 제조는 권력의 기반이기 때문에 에도성 인근에 주조소를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위 사진은 긴자 2초메의 티파니 앞에 설치된 긴자발생표지석이다. 표지석에는 "게이초 17년(1612), 도쿠가와막부는 현재의 츄오구 긴자에 은화폐 주조의 긴자 관공서를 설치. 당시, 정명은 신환전초로 여겨졌지만, 통칭으로 긴자정으로 불리며, 메이지 2년에는 정식으로 긴자를 정명으로 하는 것을 공시했다"라고 적혀 있다.
긴자 발상지 비가 서 있는 곳인 긴자 거리(중앙 거리)는 니혼바시를 기점으로 한 간사이와 간토를 연결하는 옛 도카이도(東海道, 동해길)이다. 전근대 시대 에도에서 시작하여 교토까지 495.5km에 이르는 거리를 통과한다. 1601년에 만들어졌고 총 53개의 역참이 세워졌다.
긴자의 은화주조소는 막부의 붕괴로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어 메이지 2년(1869)에 메이지 정부의 조폐국 설립에 따라 폐지되었다.
이와미 은광 & 이쿠노 은광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1592년 5월 부산포 상륙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을 시작했고 1597년 1월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은 그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다. 조선 점령을 시작으로 명나라를 치고 나아가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그의 야망을 뒷받침해 준 것은 은광이었다.
전국시대 말에서 에도시대 초기까지 일본이 수출한 은은 연간 200톤에 이르렀는데 세계 은 생산량에 40%에 달하는 양이었다. 이 은은 주로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시마네현)과 이쿠노 은광(生野銀山, 효고현)에서 생산됐다.
이와미은광
이와미 은광은 부산 동쪽으로 300여 km 떨어진 시마네현에 위치한 은광이다. 이 은광은 전국시대인 1526년에 개발된 이래 오우치씨, 모리씨, 이즈모의 아마고 씨의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에도 시대에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초기에는 여기서 채굴된 은광석을 하카타로 옮겨 조선으로 보내 재련, 정련을 하였는데, 1530년 조선에서 도입된 회취법을 성공시켜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이 슬픈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전하기로 한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은을 '소마은'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 여기서 생산된 은은 에도 시대에 거의 고갈되어 1920년대에는 완전히 폐광되었다. 2007년에 이와미 은광 및 문화 경관으로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이쿠노은광
이쿠노 은광은 오사카 근처 효고현에 있던 열수 은광산이다. 807년 은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1542년에 개발이 시작됐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할 시대를 거쳐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사도 금광산, 이와미 은광과 함께 도쿠가와막부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1973년 폐광될 때까지 1723톤의 은이 채굴됐다. 갱도의 총연장은 350여 km, 깊이는 880m에 이른다. 2011년에 이쿠노 광산 뮤지엄이 개장했다.
회취법(연은분리법)으로 일본 은의 생산이 대폭 증가하면서 일본은 세계적인 은수출국으로 성장하였다. 1530년대부터 조선에도 갑자스럽게 일본은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일본 무역사절단이 고품질의 은(銀)을 가져와 면포와 교환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중종실록에는 시전(市廛)은 왜은(倭銀)이 가득 채웠고(1540년 7월 25일), 2년 뒤에는 8만 냥(3.2톤)이나 되는 은을 싣고 와 면포를 달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542년 4월 24일). 당시 면포 2 필에 은 3냥이었고, 전체를 환산하면 12만 필 규모였다. 면포 재고가 없던 조선 정부는 1만 5000냥만 매입하고 무역단을 돌려보내야 했다.
당연히 조선 정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조선에서 개발했지만 사장시킨 회취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넘쳐나던 은은 조총 구입등 군비증강에 쓰였고 일본 천하가 통일된 후 그 조총의 총부리는 조선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재계한다. 당시 일본은 먹고살만해지니 목숨을 점점 중시하게 되었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불로장생의 명약인 조선인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인삼 가격도 폭등해서 1674년 쓰시마번(대마도)이 에도에 차린 인삼가게에서는 1근에 은 680돈에 팔던 것이 1707년에는 1440돈으로 폭등했다. 동시에 순도가 낮은 일본은인 겐쿠로은(순도64%)이 무역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조선과 왜 간에 은함량에 대한 분쟁이 벌어졌다.
인삼장사로 재미를 보던 쓰시마번은 자칫 잘못하다간 인삼교역이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다급해져서 막부를 설득하고 나선다. 인삼은 사람 목숨이 달린 귀중한 약종인데 믿을 수 있는 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막부는 1710년 9월 쓰시마번의 요구를 수용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순도 80% 짜리 특수 무역 은화(特鑄銀)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인삼대왕고은(人參代往古銀)’이라고 부른다. 옛날(往古)의 경장은과 똑같은 순도의 은화라는 의미와 일본의 조선 인삼 수입 촉진에 주조 목적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명칭이다. 막부가 긴자에서 주조한 은화 중 수입상품명이 적힌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인삼대왕고은은 극히 일부의 일본 정부 각료와 긴자의 담당자만 알고 있었을 뿐, 일반인들은 있는 줄도 몰랐다. 오로지 조선과의 무역용으로 대마도에만 전달되었고 부산 동래로 올 때는 ‘특주은 오백목(特鑄銀 五百目)’이라고 적어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렇게 해서 1712년 이후 일본은 조선 인삼을 수입해 가기 위하여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던 화폐보다도 순도가 더 높은 양질의 은화를 만들어 무역 시장에 유통시켰던 것이다.
일본의 엔화약세 정책으로 도쿄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한국보다 싼 음식값에 환호하고 고급스러운 매장에서 한국보다 싸게 명품과 일본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긴자도 그리 비싸 보이지 않아 너도나도 방문하고 앞뒤에서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이런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과거의 교훈과 미래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이제는 살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일본 대졸자보다 우리가 더 많은 급여를 받는다고 우쭐해 있다. 하지만 열흘 가는 꽃이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듯이, 세상은 변해간다. 과학과 기술을 천시했던 결과 우리가 무슨 일을 겪어야만 했는지를 일본 긴자에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한순간의 천시가 수백 년의 암흑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조선의 회취법과 같은 사례가 지금은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 원자력기술은 조선시대 회취법과 같은 처지가 아닐지 매우 걱정이 된다.
참고문헌
1. 브라이언 페이건, 피싱, 인간과 바다 그리고 물고기, 을유문화사, 2018
2. 우리역사넷
3. 주경철, 문명과 바다, 산처럼, 2009
4. 헬렌 M. 로즈와도스키, 처음 읽는 바다 세계사, 현대지성, 2019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