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과학 이야기
2018년 개봉된 일본의 코미디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정전을 맞은 스즈키 가족의 이야기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정전은 길어지고 전기에 길들여진 시민들의 생활은 무너져간다. TV, 전화는 물론 식수와 식료품도 구할 수 없었고 언제 전기가 들어올지 아무도 몰랐다. 급기야 식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 있는 외갓집으로 수백Km를 며칠에 걸쳐 가는 도중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벌어진다.
영화 같은 일이 현지 시간 2025년 4월 28일 정오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났다. 약 6,000만명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번 대규모 정전으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대부분 지역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등 일부 지역에서 모든 전기 제품 사용이 정지 됐다. 스페인과 국경을 인접한 남부 프랑스 일부도 정전 피해를 봤다.
대규모 정전이 된 지역에서는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아 교통이 마비됐다.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일부 주요 건물 주변에는 경찰이 배치돼 수신호로 교통을 통제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지하철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운행을 멈추면서 사람들이 갇히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휴대전화도 안돼 구조요청도 하지 못했다. 생필품을 사려해도 카드 결제가 먹통이라 살 수가 없었는데, 신용사회 사람들은 현금도 없었다. 스페인 내무부는 결국 당일 정전 사태로 인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사고 발생 당일 12시 30분에서 35분 사이, 몇 초 만에 15GW의 전력 수요가 갑자기 사라졌다. 전기는 수요와 공급이 절묘하게 맞아야 하는 고도의 시스템인데 발전소 측이나 아마도 전력망의 어디에선가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경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일 12시 33분 스페인 남서부 측 태양광으로 추정되는 발전력이 탈락하면서 사태가 시작되었다. 1.5초 후 추가 발전력이 탈락했고, 3.5초 후에는 스페인-프랑스 전력망 연계가 단절, 재생에너지 대규모 탈락, 원자력 및 가스터빈 연쇄단락이 이어져 계통이 붕괴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전력망 관리 업체 레드 엘렉트리카는 정전이 발생한 지 18시간이 지난 29일 아침 6시 기준 전기 공급 복구율이 99%에 다다랐다고 발표했다. 포르투갈도 28일 밤부터 전력 공급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돼 650만 가구 중 620만 가구가 다시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고 AFP 통신은 보도했다. 순간적인 정전도 큰 피해를 불러오는 현실에서 장기간의 정전은 경제활동의 단절, 교통마비, 보건시설 정지, 치안부재 등 각종 문제를 양산했다.
이번 사건은 유럽 사상 가장 큰 규모 정전으로 기록될 수 있다. 2021년엔 프랑스 남부에서 산불이 발생해 스페인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송전선로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사례가 있지만, 1시간 이내에 전력 공급이 복구됐다. 또 2003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 최대 12시간가량 전기가 끊겨 5600만 명이 피해를 당한 바 있다. 그러나 인구 6000만 명 규모인 스페인·포르투갈의 정전 피해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정전은 2012년 7월 30일~31일 인도에서 발생했는데, 전 세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6억 명이 피해를 봤다(물론 인도의 인구가 많으니 그랬다는 것). 이 정전은 낡은 전기시설과 낮은 전기요금이 빚어낸 과부하 정전으로 보인다. 그 후 인도 정부는 부지런히 낙후된 전ㄱ시시설을 복구하고 있다.
스페인의 에너지 소비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화석 연료와 원자력, 재생 에너지로 구성된다. 2020년 화석 연료의 비중은 73.7%로 구성을 보면 석유가 42.3%, 천연가스가 19.8% 그리고 석탄이 11.6%이며 원자력의 비중은 12%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스페인 국내 1차 에너지 생산(주로 전기)만을 보면, 원자력(44.8%), 태양열, 풍력 및 지열(22.4%), 바이오매스 및 폐기물(21.1%), 수력 발전(7.2%), 화석(4.5%)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에너지 생산은 이후에 급격히 재생에너지 쪽으로 옮겨간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스페인은 전체 전력 생산의 절반가량을 풍력(22.5%), 태양광(15.1%), 수력(10.9%) 등 재생에너지에 의존했다. 원자력은 19.9%를 차지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전력 공급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정전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포르투갈은 문제가 스페인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력 연결망 단절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포르투갈 총리와 EU집행부는 “사이버 공격의 징후는 없다”라고 밝혔다.
포르투갈 전력망 운영사 REN은 정전의 원인이 ‘드문 대기 현상’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진동’ 때문일 수 있다고 밝혔다. REN의 운영진은 로이터 통신에 “처음에 스페인 전력 시스템에서 아주 큰 전압 요동이 있었고, 이것이 포르투갈 시스템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REN은 “스페인 내륙에서의 극심한 기온 변화로 인해 400kV 초고압 전력선에 비정상적인 진동(일명 ‘유도 대기 진동’)이 발생했다”며 “이 진동이 전력망 동기화 실패를 일으켜 유럽 전력망 전체에 연쇄적인 장애를 초래했다”라고 밝혔다.
스페인-프랑스의 송전선 연결망에 문제가 생기면서 스페인 전력망이 유럽의 전력 시스템과 연결이 끊겼고, 결국 스페인 전력망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브뤼셀 싱크탱크인 브뤼겔의 자크만 선임연구원은 “전력망 주파수가 유럽 기준인 50Hz 이하로 떨어지면서, 프랑스를 포함해 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차단됐다”라고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프랑스 남부 일부 지역에서도 정전이 발생했다.
이번 대규모 정전의 원인으로 초기에 언급된 '유도 대기 진동(induced atmospheric vibration)'은 극심한 기온 변화에 따라 발생한다. 스페인·포르투갈 지역의 뜨거운 공기와 찬 공기가 충돌해 대기 밀도·압력이 급격히 변동하면서 초저주파의 대기 진동이 만들어지고 공기층 전체가 천천히 흔들리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진동과 송전선의 고유 진동수가 맞으면 송전선이 과도하게 흔들리게 되고, 송전선 간 거리에 변화가 생기며 전압·전류 흐름이 불안정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력망의 주파수가 흔들리면서 발전소 주파수를 흔들게 되고 일부 발전기가 자동 차단되며 과부하로 대규모 정전으로 확산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이를 발생시킬만한 기상현상이 특별히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재생에너지 전환에 앞장서고 있는 스페인은 풍력과 태양광 발전량이 60%를 넘어섰는데, 재생에너지 발전에 적합한 전력망 시스템이 부족해 이번 사태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는 보도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스페인의 전체 전력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5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드 엘렉트리카의 자체 자료에 따르면 정전 직전, 전체 전력 공급량 중 태양광이 약 53%, 풍력이 약 11%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적어도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시스템 운영에 경고등이 들어온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재생에너지는 화석 에너지에 비해 날씨 등 외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전력망 안정성 역시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반 사용전력을 담당하는 기저 전력을 재생에너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우, 공급 조절이 어려운 태양광, 풍력의 특성상 전력계통의 붕괴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스페인 남서부의 2곳의 태양광 발전소의 고장이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23년 우리나라의 전력 생산 구성에서 차지하는 신재생에너지는 9.7%이다. 태양광이 커서 5.3%, 풍력은 0.5% 정도를 차지한다(출처: 한국에너지공단). 재생에너지의 비율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총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발전의 비중을 20%, 2040년까지는 30~35%까지 늘리겠다고 2017년 '재생에너지 3020 이행계획'에서 밝혔다.
재생에너지 발전은 지역적으로 전라남도와 제주도에 편중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 알다시피 공급처와 수요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망이 필요하고, 수급의 문제로 발전량을 온전히 전체 전력망에 연결할 수 없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2015년부터 재생에너지의 발전을 중단하는 출력 제한 조치를 내렸었다. 출력제한 횟수는 2015년부터 2023년까지 풍력 446회, 태양광 93회 등 총 539회였다. 이에 따라 2024년부터 재생에너지에도 실시간 전력시장 가격·입찰제를 도입하여 공급문제를 조절하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기상 상태에 민감하여 정작 에너지가 필요한 저녁이나 구름이 끼어 햇볕이 적은 날에는 발전량이 감소한다. 또한 초과 생산된 전기를 보관할 마땅한 방법도 아직 없다. 재생에너지는 경직된 발전시스템이고 말단만을 설치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 전력 공급을 어떤 하나의 원천에 집중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경우, 전력망이 외국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력을 수출할 수도 수입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나라마다 적정한 발전원천별 비율은 다를 수밖에 없고, 전반적으로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발전을 감소시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방향이다. 하지만 이번 스페인 정전 사태에서 보듯 하나의 바구니에 모든 계란을 담는 것은 위험하다. 또한 급속한 전환 역시 전체 시스템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 적절한 포트폴리오를 적절한 타이밍으로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고 기술적, 경제적인 결정의 문제인 것이다.
참고문헌
1. 스페인 대정전…재생에너지 과의존이 원인? 한국도 경계해야, 에너지경제신문, 2025.05.03
2. 스페인·포르투갈 대규모 정전…비상사태 선포, 문화일보, 2025.04.29
3. 위키백과
4. '유도 대기 진동'이 원인? 뜨겁고 찬 공기 충돌로 송전선 흔들…전압 불안, 한국경제신문, 2025.04.29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