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라 Jul 28. 2022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

주의: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믿어왔던 세계와 불화하는 경험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정의로울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배신당하기도 하고, 나고 자란 공동체가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억압하고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오랜 시간 뿌리내린 세계와의 단절은 유쾌할 수 없으며 반드시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을 소리 내어 긍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첫 표지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는 기독교 세계와 불화하는 아이들을 조명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의 존재를 믿고, 아무리 아파도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고, 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삶의 목적이라고 배우던 아이들이 기어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불화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귀 기울입니다.


독실한 개신교 목사 가정의 모범생 아들로 자라난 중학생 선우는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소년 다윗과 친해집니다. 다윗 역시 다른 교회 목사의 아들이지만,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소위 날라리입니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죠. 다윗에게 교회는 거짓말을 종용하는 곳이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 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는 아무 일 없는 척 수요예배를 하는 위선적인 부친의 공간입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28화. 다윗이 선우에게 없는 신앙을 있는 척 거짓말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와 불화하지만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어린 친구들 선우, 다윗, 그리고 다윗의 여자 친구 주영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서로를 의지하게 됩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선우와 주영도 교회의 위선적인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나쁜 길”로 유혹할 수 있으니 다윗 같은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는 어른들에게 “예수님도 가려서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주영이와 (17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적힌 교회 현수막을 보며 “자기들이 하기 싫은 건 다 하나님 시키네”라고 생각하는 선우(21화)는 모두 교회가 얼마나 편협할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영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다면 다윗이 지옥에 가게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선우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교회를 떠나는 일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갑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17화, 다윗의 여자 친구 주영은 다윗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회 어른에게 "예수님도 가려서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라고 답한다.

그러나 다윗이 부활절(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해 승천한 것을 기리는 날) 전날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남겨진 주영과 선우는 그들이 속한 세계에 속절없이 강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만 주영이 망설임 없이 교회를 떠날 때, 목사의 아들인 선우는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마다 교회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주일성수'의 명령 때문이고, 부모는 물론 모든 성도가 선우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가대원인 선우는 다른 사람들의 예배 시간에서 기대되는 감동을 지켜주기 위해 계속해서 신을 찬미해야 합니다. 사랑했던 아이의 죽음을 보고서도 바로 다음 날 예배에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신의 아들을 노래해야 하죠. 이 부분은 교회가 목회자 자녀들이 자신의 고충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환경임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목회자 자녀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상관없이 여전히 많은 목회자 자녀들은 그들에게 향한 높은 기대감을 내재화한다. [...] 이 과정 중에 많은 목회자 자녀들은 본인들이 화가 난다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은 완벽한 목회자 가정의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들의 부모님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배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 자녀들이 자신의 솔직한 감정표현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주혜, 396쪽)

하지만 평소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고 내성적이며 불평 한 번 않던 선우에게도, “다윗이는 죽었는데, 예수는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당함과 공포로 다가옵니다 (36화). 선우의 우울은 다윗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그 우울은 선우를 교회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거기에 선우의 모친은 다윗을 향한 선우의 사랑을 죄악시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선우의 정체성을 부인하기 시작합니다. 선우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신의 사랑과 슬픔을 꾹꾹 눌러가며 스스로를 억압한 결과,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죠.  

<요나단의 목소리> 36화, 다윗이 죽은 후, 선우는 부활절 찬송가인 "무덤에 머물러"를 부르다 울음을 터뜨리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대상을 보내주지 못하고 그 상실을 내면화할 때 우울(멜랑콜리)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Mourning and Melancholia,” 249쪽).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공적 공간에서 애도하지 못하는 슬픔이 우울이 되는 전개, 애도의 불가능성이 강조되는 플롯은 퀴어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흐름입니다 (아메드, 179쪽). 그런데 선우가 잃어버린 것이 비단 다윗뿐일까요? 교회와 불화하는 청소년이 잃어버리는 것은 애초에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요?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아이들은 ‘성도는 교회의 몸 된 자들’이라는 성경 구절(고린도전서 12장 12-20절)을 말 그대로 수행(perform)하며 자라납니다. 때문에 그들이 제도화된 종교,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와 충돌하는 순간, 그리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는 순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도려내는 아픔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때 교회의 몸 된 자들이었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한 몸이었던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도려내고, 끊어내고, 잘라내는 일이니까요. 실제로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혹은 호모포빅(homophobic)한 교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교회를 나온 청년들은 "크고 작은 불안, 죄책감과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김혜린, 35쪽). 한 연구 참여자는 교회는 "자아의 전부"라고 느꼈기에 "교회를 떠나는 순간부터 '공허함'이 찾아왔다"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김혜린, 35쪽). 교회가 자아의 전부라고 느끼고 있었다면, 교회를 떠나는 일(탈-교회)는 자아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선우가 잃어버린 대상 역시 다윗뿐만이 아니라 선우 자신도 포함됩니다. 다윗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다윗의 상실을 내면화해서가 아니라, 선우 자신이 더는 교회라는 하나의 몸의 일부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는 더는 교회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선우의 사랑을 기뻐하지 않고 선우의 슬픔을 슬퍼할 만한 일로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로마서 12장 15절)라는 성경 구절이 좌절되는 순간입니다. 이성애 중심주의와 퀴어 혐오의 공동체에서 퀴어 청소년은 이방인이 됩니다. 공동체가 이성애를 기뻐하고 동성애를 적대시할 때,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방인이 됩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없는 순간 그의 신체, 그의 목소리는 그냥 사라집니다 (아메드, 83쪽). 그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요나단의 목소리> 40화, 선우의 모친은 아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목사인 부친과 성도들로부터 숨기라고 말한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제목부터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인 양 침묵되었던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작품은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얽혀 펼쳐지죠. 구약 성서에 따르면 요나단은 고대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아들이고, 다윗은 양치기였지만 신의 뜻에 의해 차기 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아껴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지 못하도록 목숨을 걸고 그를 돕습니다. 다윗 역시 요나단을 매우 사랑했음이 사무엘상 곳곳에 등장하고요. 그래서 이 둘은 퀴어 신학(퀴어 이론을 바탕으로 한 성서해석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주류 기독교계에는 퀴어 신학은 물론 성소수자 전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성애로 해석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 코멘터리 북>, 26-28쪽).


따라서 <요나단의 목소리> 속 다윗을 사랑하는 남자아이인 선우가 자신을 요나단에게 대입하며 “제가 정말 다윗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인가요? 아, 제발 그렇다고만 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그 애에게 겉옷을 벗어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도 내어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라고 기도해도 (34화; 구약성서 사무엘상 18:4 참조), 이러한 기도는 소리 내선 안 되는 기도입니다. 이성애 중심주의와 충돌하는 모든 사랑을 음험한 욕망으로 해석하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아들은 자신이 남자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보수 기독교계에서 금기시되듯, 다윗을 사랑하는 선우의 목소리 역시 교회에서 침묵되어야 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34화, 선우는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라면 다윗을 사랑하여 군복과 칼과 활과 허리띠를 내어준 요나단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기도한다.

선우의 목소리는 작품에서 여러 차례 그 아름다움이 강조됩니다. 인물들의 말에 따르면 선우의 미성은 무척 곱고 맑아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독자들은, 당연하게도, 그 목소리를 도저히 '들을' 수 없습니다. 작품 제목은 <요나단의 목소리>이지만 독자들은 오직 시각에만 의존해 선우의 목소리에 다가가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죠. 모친이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생각하고 부친과 성도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기로 했음을 알게 된 날, 선우는 “나의 사랑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을 깨달”은 후 우울의 바다에 잠겨 절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40화). 하지만 핸드폰 화면 너머 혹은 책장 너머의 독자들은 선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흔한 "으아아아" 같은 효과음도 없습니다. 들리지 않는 선우의 목소리는 우리의 읽기 경험이 얼마나 고요한 활동인지를 상기하고, 동시에 선우의 목소리가 얼마나 ‘들리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체감하게 합니다. 그러니 독자들이 선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작품이 시각 매체여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우의 목소리는 원래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니까요.

<요나단의 목소리> 63화, 교통사고를 당한 선우가 그려져 있다. 의영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도 그냥 즐겁게 노래할 수 없었던 선우를 생각한다.

하지만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지고 색마저 철저히 제한된 이 흑백 만화는 분명 독자의 청각을 활용합니다. 작가가 실존하는 노래를 인용함으로써 ‘읽기’의 경험을 ‘듣기’의 영역까지 확대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실제 존재하는 곡들의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기억 저편을 뒤적거려 멜로디를 찾아내거나 혹은 인터넷에 검색해서라도 노랫소리를 '듣게' 합니다. 독자들이 기억하는 노래와 유튜브에서 들어보는 노래는 선우의 목소리로 녹음된 것이 아닐뿐더러 때로는 (특히 비기독교인 독자들이 처음 듣게 되었을 찬송가의 경우처럼)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작가가 코멘터리 북까지 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이 인용한 곡들의 제목을 보여주는 것은 출처를 성실하게 밝히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핸드폰 화면과 인쇄지가 들려주지 못하는 노랫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굳이 기억해내고 찾아 들음으로써 독자들은 들리지 않는 소리에 예민해집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선우의 목소리를 어설프게 상상하게 되고, 그 아이의 목소리로 그 아이의 삶을 읽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5화, 의영은 선우가 피아노를 치며 Pie Jesu를 부르는 것을 듣는다. 의영은 이 순간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기억"이라 회고한다.

만화 속 캐릭터인 선우의 목소리는 완벽하고 선명하게 들릴 수는 없는 종류의 것, 언제나 다른 매체나 기억, 독자 내면의 목소리에 의존해 재구성되어야 하는 목소리입니다. 선우의 우울이 독자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온전히 선우 자신만의 것인 것처럼요. 그리고 독자는 잘 알지 못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 부단히 애를 쓰는 과정 – 조용히 아이의 표정을 읽고, 말풍선에 녹아 있는 아픔을 곱씹고, 기억 언저리에 남아 있는 자우림의 노래나 찬송가의 멜로디를 재생하는 과정 – 속에서 자신의 우울 역시 마주하도록 유도됩니다. 독자가 선우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선우의 우울을 자신의 우울과 연결할 여지를 만듭니다. 불완전한 공백을 채울 상상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독자 자신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시점 역시 바꿔가며 전개되는 작품 이곳저곳에 흩어진 선우의 목소리를 주워 담을 때, 우리는 우리가 버려 놓은 우리의 일부 역시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누구도 전유할 수 없는 선우의 슬픔을 들을 때 독자들, 특히 교회를 떠나온 독자들은 스스로에게도 묻어놓은 목소리들과 상흔이 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많은 뛰어난 이야기가 그러하듯, <요나단의 목소리>는 주인공의 우울을 주인공만의 것으로 남겨두면서도 바로 그럼으로써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만의 우울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요나단의 목소리>는 우울을 그저 반복하기 위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선우의 관찰자 의영 덕분이죠. 선우의 고등학교 룸메이트인 의영은 기독교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 문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목회자 자녀가 감당해야 할 일들은 그야말로 문화충격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가업처럼 물려받는 것도 아닌데 부모의 일을 직접 도와야 하는 것 (6화), 팝송이나 가요 등을 ‘세상 음악’이라 부르며 못 듣게 하는 부모 (4화),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언제나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늘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사근사근 웃어드려야 하는 일 (7화), 그리고 죽음과 지옥에 대한 때 이른 공포까지 (38화). 의영은 선우를 괴롭게 하는 세계와 질문들을 멀게 느끼지만, 자신이 느껴본 바 없는 상황임을 알기에 자신과 선우 사이 간격을 존중하고 선우를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4화, 의영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 '세상 음악'이라는 말에 의문을 가진다. "그럼 '안 세상 음악'은 뭐란 말인가?"

동시에 의영은 선우가 다윗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죄스럽게도 여기지 않습니다. 다윗이 보고 싶다며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선우를 보며 의영은 다윗을 향한 선우의 마음을 눈치채지만, 그 사실을 전혀 '이상한' 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19화). 그래서 의영은 선우가 처음으로 다윗 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사랑을 죄악시하는 교회와 가정 때문에 영원히 침묵해야 할 것 같았던 선우에게 의영은 다윗은 “어떤 애였어?”라고 물어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39화). 의영이 있었기에 선우는 조금이나마 고여 있던 그리움을 말로써 흐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걔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고마워. 다윗이 얘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57화). 의영은 선우가 사랑했던 아이를 여느 또래들의 대화 주제처럼 조금은 가볍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선우가 소리 내어 사랑과 슬픔을 이야기해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좋은 청자가 되어 주죠. 그는 선우를 궁금해하고, 선우가 들었던 노래, 선우가 봤던 영화를 찾아보고, 또 혼자 퀴어 영화나 소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타인의 세상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의영의 태도는 선우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독자의 태도이기도 하기에, 독자들은 의영을 따라 선우를 깊이 알아가려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57화, 함부로 다윗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의영에게 선우는 의영이 다윗을 기억하고 있어서 고마웠다고 말한다.

의영은 '요나단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의미를 확장합니다. 의영이 없었다면 제목 속 요나단은 ‘다윗’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사랑한 선우와 주영만을 의미할 수 있었고, 반드시 교회와 성경의 언어 안에서만 의미 구현이 가능한 제한적인 메타포에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의영은 교통사고를 당한 선우를 살려만 달라고 빌기 위해 처음으로 기독교의 신에게 기도하고, 이때 의영의 목소리는 또 하나의 요나단의 목소리가 됩니다 (62화). 선우라는 요나단이 목소리를 내도 괜찮은 안전한 장소가 되어주는 것을 넘어, 스스로도 누군가의 삶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목소리를 가진 요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의영은 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는 삶을 살다가 선우의 괴로움을 지켜보게 되면서 신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친구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의영이 할 수 있는 것은 선우의 삶이 어떻게든 이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뿐입니다. 신을 미워하는 의영의 기도는 역설적으로 그를 또 한 명의 요나단으로 만들고, ‘요나단의 목소리’라는 말도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넘어 사랑하는 이의 삶이 지속되길 바라는 염원, '그를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붙잡아 두고 싶은 간절함의 목소리'로 확장됩니다. 의영의 소리 없지만 간절한 기도는 트랜스 상태의 선우에게 똑똑히 들릴 뿐 아니라 (65화),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라는 성경 구절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재현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절).

<요나단의 목소리> 65화, 선우는 교통사고를 당해 기절한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의영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선우는 의영이 없었다면 불완전한 애도와 침묵으로 점철된 삶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의영의 목소리는 선우를 살렸고, 선우는 이제 새로운 목소리, 곧 자기 긍정의 목소리를 얻게 됩니다. 선우는 수술의 여파로 본래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날카로운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살아가게 됩니다 (63화). 하지만 바로 그 목소리로 선우는 부모에게 “저 동성애자예요”라고 선언합니다 (64화). “내 목소리 아닌 것 같”은 어색하고 새로운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로 처음 내뱉는 말은 분명한 자기 긍정입니다 (64화). 아름다운 목소리로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노래하던 선우가 이제 듣기 싫은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의영은 “귀를 아주 가까이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가장 작고 거친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선우와 함께 걷고 마주 보고 대화합니다 (64화). 자신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선우의 세상에서 “다만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 합니다 (65화). 얼굴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들을 때 의영의 앞에 비로소 성가대복을 벗은, 교회가 기대하는 자아를 벗고 온전히 자신으로서 살아갈 준비가 된 선우가 서 있습니다 (65화). 의영의 기도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선우 역시 비로소 자신이 속해 왔고, 불화했고, 괴로워했던 세계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찾게 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 65화, 의영은 "여전히 어렵고 이상한 선우의 세상에서 다만 고개를 돌리지 않기로 했다."


정해나 작가는 <요나단의 목소리 코멘터리 북>에서 독실한 개신교 목사 가정의 딸로 살아온 자신이 이 작품을 그리는 것은 “인생에서 해본 어떤 일보다도 굳은 각오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11쪽). 작품을 그리는 일이 거의 비장함에 준하는 결연함을 요구하는 것은 작가가 “교회 속 혐오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맞서 싸울 용기는 없었”던 날들을 경험했고, 이제는 그날들의 자신으로부터 지금의 자신을 어느 정도 분리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8쪽). 작가는 몸 된 교회로부터 자신의 살을 떼어내는 괴로운 감각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내밀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그림과 글로 재현하고, 진공 상태에 묻어 두어 들릴 일 없던 목소리들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주체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자신과 불화하며 앞으로 나아왔던 이들과 여전히 과거의 세계에 발이 묶여 있는 이들을 동시에 위로합니다.


이러한 위로는 아주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의영의 기도를 수술실에 기절해 있던 선우가 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읽기 경험이 도저히 들릴 수 없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행위인 것처럼. 분명 만화를 읽는 것은 소리 없는 행위입니다. BGM을 특별히 제작해서 첨부하거나 오디오 웹드라마를 만들지 않는 이상, 만화를 읽는 일은 아주 조용한 행위지요. 너무나 조용한 나머지, 독자는 종종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곤 합니다. 들리지 않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채워주는 상상력은 독자 자신이기에, 우리가 듣는 인물들의 목소리엔 반드시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조각조각 기워져 있습니다. 들려선 안 되는 슬픔, 내뱉어선 안 되는 괴로움을 듣는 인물들을 보면서 독자 역시 자신 안에서 침묵 중이었던 감정들을 듣게 됩니다. 작품 속 인물에게 귀 기울이는 일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연습 또한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독자들이 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려 귀 기울일 때, <요나단의 목소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 귀 기울입니다. 서로의 요나단이 되어 서로의 생명을 귀히 여깁니다. 과거의 나를 잃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https://kr.dillyhub.com/home/haena/callsofjonathan

참고문헌

김혜린. "불화하는 여성들: 2030 탈교회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국내 석사학위논문, 서강대학교 대학원, 2022.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 딜리헙, 2018-2021, https://kr.dillyhub.com/home/haena/callsofjonathan.

---. <요나단의 목소리> 단행본, 2022. 

---. <요나단의 목소리: 코멘터리 북> 단행본, 2022.

최주혜. "한국 목회자 자녀의 수치심." <신학과 실천> 제36호, 2013, pp. 389-415.

아메드, 사라.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19.
Freud, Sigmund. “Mourning and Melanchol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translated by James Starchey et al., vol. 14, London: Hogarth Press, 1994, pp. 243-58.


- 작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정해나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전 02화 행복의 길 바깥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