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라 Jul 29. 2022

분위기를 깨는 즐거움, 그 알싸함에 대하여

작가1 작가의 <알싸한 기린의 세계>

최근 페미니즘을 논의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자 토론의 장으로써 기능하는 웹툰의 수가 괄목할 만큼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일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1 (@offthe_0931) 작가의 인스타툰이 몇 주 전 단행본 <알싸한 기린의 세계>로 출간되었습니다.


<알싸한 기린의 세계> 표지

‘알싸하다’는 ‘매운맛이나 독한 냄새 따위로 코 속이나 혀끝이 알알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민경 작가의 말처럼, “여기서 알싸한 건 기린일까, 그의 세계일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민경, 추천사). 가부장제 한국 사회가 사람을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 보고 여성에 걸맞은 위치, 겸손함, 효, 의무, 외모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의 존재 가치를 폄하할 때,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회가 건네는 모든 말을 도저히 삼킬 수가 없습니다. 삼키면 목이 따끔거리고 눈에 물이 고입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한국 사회는 알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가부장제는 맵지 않고 오히려 달달합니다. 그래서 수혜자들의 눈엔 가부장제 사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알싸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귀에 페미니스트의 신랄함과 속이 타는 비명들을 너무 맵고, 너무 과격합니다. 이에 작가1 작가의 페르소나인 ‘기린’은 묻는 것입니다: “고작 여자들이 침묵하지 않는 게 그렇게나 과격한데 수십 년간 쭉 이어져온 온갖 여성 대상 범죄나 혐오는 과격해서 어떻게 견디셨어요?” (작가1, 152쪽).

@offthe0931 인스타툰 스크린샷. 2022년 1월 14일 업로드. <알싸한 기린의 세계> 152쪽 수록.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성차별주의자들의 주장에 하는 역공의 타래입니다. 짧지만 명확하게 상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기린의 대답들은, 독자들이 폭력과 보복이 두려워 차마 내뱉지 못할 말들을 대신 발언하거나, 독자들의 ‘할 말 리스트’에 추가되어 여성혐오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 쓰일 유용한 안내서로 기능합니다.

@offthe0931 인스타툰 스크린샷. 2022년 3월 1일 업로드. <알싸한 기린의 세계> 68쪽 수록.

“나는 여자가 나보다 능력 좋고 강하면 이성으로 안 느껴져”라는 말에 “알아.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보여서 안 끌리지?”라고 질문하는 기린의 대답은 신랄한 동시에 품위 있습니다 (68쪽).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개인으로 보지 않는 가부장제 시선을 꿰뚫어 보기에 신랄하고, 그 신랄함을 질문을 통해 내보임으로써 상대의 입을 막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자신의 속내를 마주하게 한다는 지점에서 품위 있습니다. 기린의 말을 막고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데도, 기린은 피곤함을 무릅쓰고 그들의 말에 성실하게 응답합니다. 대화를 통해 세상의 부당함을 고발합니다. 기린의 세계는 고통받지만 닫혀 있지 않습니다. 그의 세계는 연대자들뿐만 아니라 혐오자들에게도 열려 있고, 그들과의 대화는 (대화라고 이름하기도 민망할 수 있겠으나) 기린을 말로써 정치적 힘을 확보하는 한 명의 발화자로 만듭니다.


기린은 말로써 자기 긍정을 수행하고 말로써 사회의 부조리함을 폭로합니다. 말들이 엮이어 그의 세계를 이룹니다. 가부장제를 부정하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는 세계가 아니라, 작금의 차별적인 세계를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한 결과로써의 세계이지요. 혐오자들과 대화할수록 눈이 매워지고 코가 찡해지더라도 기린은 자신의 세계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는 세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선택합니다.


왜 우리는 도망가면 안 될까요? 사실 도망쳐도 됩니다. 도망가야만 할 때도 많습니다.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떠나야 할 때. 페미니스트들에게 한국 사회는 결코 안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와 불화할지언정 생명과는 불화해선 안 되기에, 떠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선택이지요.


다만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눈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차별이 없는 양,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은 양 굴지 않는 것입니다.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될지언정 폭력의 희생자를 비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웃지 않는 것입니다. 한 남성은 기린에게 “여자 남자 사이가 좋고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27쪽). 이에 기린은 말합니다.

<알싸한 기린의 세계> 28쪽.
“그때가 무슨 시절이었는지 알아? 가정 폭력을 당한 여자가 눈에 계란을 문지르는 게 개그 코드였던 시대야. 그 개그에 웃지 않으면 예민한 사람 취급을 당해서 어떻게든 웃고 괜찮다고 합리화를 해야 했던 시대라고” (28쪽).

웃음을 공유하지 못하는 순간은 어색합니다. 공동체가 웃을 때 함께 웃지 않는 것은 '그때'든 지금이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웃음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온전히 소속되어 있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혼자 웃지 않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외롭고 불편합니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는 피해자를 비웃고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기 때문에, 이 안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도저히 웃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웃을 수 없음’이 이들을 예민한 사람, 프로불편러로 만듭니다. 왜 함께 웃을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면 설명충으로 만듭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면 PC(Political Correctness)하다고 비난합니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 퀴어 이론, 탈식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통찰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는 페미니스트를 ‘분위기 깨는 사람(killjoy)’이라 부르면서, 페미니스트가 인식하고 피부로 느끼는 사회의 부당함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방해 공작”으로 읽히는 사태에 대해 숙고합니다 (아메드 122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어떤 식으로 말하든 ‘논쟁을 유발한다고’ 평화를 깬다고 간주된다. …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성차별 같은 불행한 주제들을 놓고 떠들어대서이기도 하지만, 행복이란 게 잘 지내지 못함을 나타내는 바로 그 기호들을 지워 버림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페미니스트들은 진짜 분위기를 깬다. 어떤 장소들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121-122쪽)

이런 사회는 약자의 불편함을 강자의 즐거움보다 하등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끝끝내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웃기를 거부하며,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근우, 8쪽;196쪽). 그들은 종종 주류에서 밀려나고, 영영 이방인 취급을 받습니다. 기분 좋은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은 분위기를 깨면서 사회의 부당함을 가리고 있던 장막 역시 들추어내고, 행복하다는 환상을 깨버리니까요.


하지만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분위기 깨는 이방인이 되더라도 폭력으로부터 눈 돌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부당한 사회가 안겨주는 스트레스를 감수하고서도 무언가 말하는 것입니다. 아메드는 이런 이들을 혁명가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불의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는 사람들 (아메드 306쪽). 하지만 "기꺼이 스트레스도 감수하겠다는 의욕"이 있는 사람들 (307쪽). 기린이 만났던 페미니스트들 역시 아메드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가인 것입니다. 그들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억압에 굴복하지 않으며 차별에 투쟁하고도 안전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니까요 (작가1, 315쪽). 약자를 비웃는 웃음을 거부하고 혐오자들의 판타지를 깨는 데서 오는 웃음을 환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기린은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도 살아 있을 수 있음을, 그것도 즐겁게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이기에 귀합니다. 그는 알싸한 세계를 버리고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외치며 행복을 찾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밈(meme)만큼이나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재미있습니다. 정말 웃깁니다. 동글동글하고 심플한 선으로 표현되는 적나라한 분노의 표정이 웃기고, 환멸과 체념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대사들이 웃깁니다. 작가가 선사하는 웃음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기에 불편하지 않고, 그가 가해자의 밑바닥을 들추어내는 순간은 통쾌하죠. 맛있게 매운 기린의 대답들은 유독할 정도로 매운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결코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 안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냅니다.


 알싸한 세계를 헤쳐 나가는 고단함 속에서도 ‘앗싸!’를 외치는 나날은 분명히 있겠지요. 세계와 불화하는 과정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혐오자의 말에 다같이 웃어 주는 분위기를 깨는 순간, 그 순간의 희열!: “분위기[즐거움]을 깨는 데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분위기를 깨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있는 일이다” (아메드, 160쪽). 분위기 깨는 즐거움을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알싸한 그 맛은 가히 중독적이고, 놀랍게도 건강에 이롭습니다.

<알싸한 기린의 세계> 286쪽


http://aladin.kr/p/wPbFD


참고문헌

아메드, 사라.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옮김, 휴머니타스, 2019.

이민경. <알싸한 기린의 세계> 추천사, 든, 2022.

위근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시대의 창, 2019.

작가1. <알싸한 기린의 세계> 든, 2022.

- - -. 인스타툰 https://www.instagram.com/offthe_0931/?igshid=YmMyMTA2M2Y%3D


- 작품에 대해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작가1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전 04화 장애 재현과 '귀여움'의 활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