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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물에 정들었던 에든버러 여행 2일차

아서스 시트와 홀리루드 궁전 정원이 주는 감동

by 딱정벌레
아서스 시트에서 내려다 본 에든버러. 사진=딱정벌레

에든버러에서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영국 여행 8일 차 되는 날이자 출국 전날 사실상 마지막 여행일.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영국의 비는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날은 아서스 시트에 오르고, 홀리루드 궁전을 구경한 뒤, 전날 못 갔던 작가박물관과 에든버러 캐슬, 위스키 박물관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가족에게 줄 선물로 캐시미어 니트나 목도리도 사고. 다음 날 새벽에 공항으로 떠나야 했기에 사실상 현지 호텔에서 마지막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먹고 길을 나섰다.

아서스 시트(Arthur's Seat)는 사화산이며 에든버러의 여러 언덕 중 하나다. 왕실 공원인 홀리루드 공원의 여러 명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숙소에서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서 짧게나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숙소를 나설 때는 비가 내렸는데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향해 올라갈 때는 날이 개고 있었다. 난 전날 갔던 칼튼 힐 급의 언덕을 생각하고, 오늘 여행 마지막 날이랍시고 원피스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왔건만. 아서스 시트는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다가 올라가면 갈수록 길이 등산로에 버금갔다.

아서스 시트 올라가는 길. 사진=딱정벌레

전날까지만 해도 에든버러가 도시는 예쁘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째 날은 달랐다. 거기에는 아서스 시트가 크게 일조했다(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한 게 둘째 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래도 여행기 쓰고 보니 첫째 날도 이제 와서 추억하면 좋은 시간이었더라). 일단 언덕을 오르며 틈틈이 내려다본 에든버러 전경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림 같은 풍경. 올라가는 길도 무척 아름다웠고. 에든버러에는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칼튼 힐, 아서스 시트 외에 에든버러 캐슬도 그렇고. 망원경을 보듯 이 도시를 내다보니 마음이 넓어지고 현미경 보듯 들여다볼 때 못 봤던 도시의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다.

날이 개는 듯했는데 역시나 언덕을 오르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렸다. 길도 넓지 않은데 반려견을 데리고 여기 오른 사람도 많고.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개를 무서워하는 내가 움찔거리니 맞은편에 오던 사람이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예요"라며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여기도 오가면서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정상(?)에 오를 때 길이 평탄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어떤 여성분이 "손잡아줄까요?"라고 내게 물어봐줬다. 괜찮다고 했지만 여행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소중한 추억이다.

홀리루드 궁전으로 내려가는 길. 사진=딱정벌레

정상에서는 사진을 찍기가 녹록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찍어도 다른 사람이 배경으로 나왔다. 이렇게라도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본 데 만족하며 홀리루드 궁전을 향해 내려갔다. 홀리루드 궁전은 1128년에 데비드 1세가 세웠다는데 원래 홀리루드 수도원이 전신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국왕 부부가 살았지만 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가 여름에 와서 지내고 간다고. 관리도 영국 왕실에서 하는 듯했다. 궁전 외에 갤러리도 있고, 입장료는 무려 15파운드. 오디오 가이드를 주는데 한국어는 없었다.

홀리루드 궁전 내부는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했다. 그래서 바깥 사진밖에 찍지 못했다. 예전에 쓰던 침실이나 집기를 잘 전시해놓았고 입장료가 아깝지 않게 볼거리는 풍부하다. 오디오 가이드가 백미였는데. 말이 오디오 가이드지 비디오 기능에도 충실하다. 내가 신기했던 건 이 가이드 기기가 꽤 최첨단 기기라는 것. 불타고 일부만 남은 예배당 건물이 있는데 가상현실로 과거 모습을 재현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가이드 기기 화면에 뜬 특정 방의 현재 사진을 손으로 문지르면 과거 이 방의 모습이 나왔다. 신기해서 영상으로 찍었음.

홀리루드 궁전 외관과 정원. 사진=딱정벌레

홀리루드 궁전 관광의 마지막 코스는 정원이다. 영국이 정원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역시 궁전의 정원이 참 일품이었다. 때는 10월이고, 가을이라서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푸른 초원도 아름다웠고, 때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개고 있어서 더 아름다웠다. 정원은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이날도 갈 곳은 많았지만 끝나가는 여행을 아쉬워하며 최대한 정원 풍경을 눈에 담으려 했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도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살만한 건 없었다. 궁전이랍시고 왕실 콘셉트로 화려하게 장식한 걸 팔았지만.

작가박물관과 에든버러 캐슬, 위스키 박물관, 캐시미어 가게로 가려면 구시가지로 이동해야 했다. 스코틀랜드 의회 건물을 지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점심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렀다. 이름이 '오 잉크'라는 곳인데 메뉴가 특이했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음. 외사촌 동생과 나는 돼지고기를 삶아서 빵 안에 햄버거 패티처럼 넣은 메뉴를 먹었다. 세트 메뉴인데 과자도 같이 줬다. 이건 한국에 들고 와서 꽤 시간이 지난 뒤에 먹었다. 현지에서 콜라를 마실 때는 주로 다이어트 콜라를 마셨다. 한국보다 콜라 종류가 다양해서 좋았다.

점심으로 먹은 오 잉크의 의문의(?) 버거. 시진=딱정벌레

점심을 후딱 해치운 뒤,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향했다. 차에서 금방 내렸지만. 이 박물관은 스코틀랜드 문학 거장 3인의 생애와 관련 물품(책, 체스판, 원고 등)을 전시했다. 로버트 번스, 월트 스콧 경,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그 주인공. 박물관 건물은 무려 1600년대에 지었고, 스테어 백작부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플래시를 터뜨린 채 사진을 찍지 말라고 안내했다. 난 아예 사진을 찍지 말라는 말인 줄 알고 내부 사진을 거의 안 찍고 건물과 출입문 사진만 찍었는데 조금 아쉽다. 내부는 마치 동네 사랑방 같았다.

난 문학 관광하는 게 좋은데 작가 박물관에서 전시한 작가를 잘 몰라서 아쉬웠다. 작품을 하나라도 읽어봤더라면 더 즐겁게 관람했을 텐데. 난 국내에서도 여행을 가면 문학 박물관 같은 곳이 마음에 든다. 대구문학관도 재미있고, 통영에서는 박경리 문학관이 참 좋았다. 대구 진골목은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그 동네에 가면 마당 깊은 집 기념관이 있다. 이상화 시인 고택도 좋고. 부여에서는 신동엽 시인 생가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친 여러 요소를 볼 수 있어서 좋은 듯도 하다.

작가박물관 외관. 사진=딱정벌레

하긴 국내엔 문학기행 할 곳이 많지. 토지나 태백산맥 등. 대학시절 태백산맥 문학기행 다녀오려고 했는데 일정이 뒤틀려서 어떤 할아버지와 선배, 동기와 의문의 지리산 기행을 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곰 출몰 가능성이 있어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데 관리자에게 걸려서 벌금 물 뻔했던. 대학교 1학년 때라서 뭔지도 모르고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위험했다. 박물관에서는 차분하게 음악을 들으며 구경을 하고, 기념품 가게에서 에든버러 그림엽서를 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답게 풍경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었다.

작가 박물관에서 로열 마일 거리를 따라가면 에든버러 캐슬이 바로 연결됐다. 캐슬 자체가 하나의 소도시였다. 예배당도 있고, 포로수용소 같은 곳도 있고, 감옥도 있고, 전쟁기념관도 있다. 감옥에는 마네킹도 전시됨. 죄수의 생활상을 전시한 걸 보니 예전에 거제 포로수용소에 다녀왔을 때가 떠올랐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아픈 역사를 너무 전시용으로 희화화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녀오고 마음이 불편했다. 2006년이었던가. 그때 이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일기 쓴 기억이 난다. 에든버러 캐슬이 워낙 넓고 볼거리가 많아서 2시간은 잡고 관람해야 한다.

에든버러 캐슬 내부와 바깥 풍경. 사진=딱정벌레

캐슬을 나와서 위스키 박물관에 갔을 때는 이미 관람 시간이 끝나갈 때였다. 위스키에 큰 흥미는 없어서 기념품 가게만 구경했다. 미니어처처럼 작게 포장한 위스키는 마음에 들었다. 하긴 스코틀랜드 하면 위스키의 고장. 디아지오도 영국 회사고. 유통 담당할 때 디아지오 간담회에 갔는데 영국 대사관에서 진행했다. 그때 처음 대사관을 구경했는데 잠시 시간 이동한 느낌. 그때 디아지오 모델이 현빈이었고 그가 간담회에도 왔는데 머리 기를 때였고 그리 멋있지(?) 않았다. 그래도 기념으로 열심히 줌을 당겨서 사진 찍었다만. 많은 연예인을 본 건 아닌데 난 강동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 듯.

공식 관광은 끝났고 이제 쇼핑할 차례였다. 로열 마일에는 캐시미어 가게가 널렸다. 캐시미어 100%, 울 블렌딩이 있으니 잘 가려서 사야. 난 아버지와 언니 선물로 니트를, 어머니 선물로 목도리를 샀다. 아버지는 니트를 겨울 내내 잘 입으셨다. 목도리는 어머니가 잘 안 하셔서 결국 내가 했던. 목도리 2개를 45파운드에 파는 곳이 많았다. 니트는 그보다 좀 비싼데 10만원은 된 것 같다. 가게에서 내가 물건을 많이 사서 그런지 친절하게 대해줬다. 면세 혜택을 받는 데 필요한 서류를 이것저것 받고 나왔다.

1번 로열 마일 거리 풍경, 2번 위스키 박물관 기념품 가게, 3~4번 블랙웰 서점. 시진=딱정벌레

외사촌 동생이 전자담배 가게에 살 게 있어서 에든버러 대학 근처에 들렀다. 지난해 봄이었나, 여름이었나. 대마초 성분을 사업화한 스타트업을 묶어 기사를 쓴 적 있는데 여행 가서 이게 기호용 제품으로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티백처럼 팔기도 하고, 음료수도 있고. 이건 나중에 별도 포스팅을 올릴까 싶기도 하고. 미국에선 이걸 그린 테크라고 한다고. 지난해 실리콘밸리 기술 트렌드였다는 말도 있다. 이를 둘러싼 이념 함의를 보면 흥미로운 분야이긴 하다. 난 하고 싶지 않지만. 이어서 알디 닮은꼴인 리들 슈퍼마켓을 구경하고 블랙웰 서점도 들렀다. 서재에 서점의 추천문구를 손글씨처럼 써서 예뻤다.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 코너도 따로 있고.

여행이 끝나가는 밤이 아쉬워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카페 네로에서 스콘과 커피도 사 먹고, 브루독에 들러 맥주도 마시고. 저녁을 따로 먹으려고 딜리버루로 배달 음식도 따로 주문했다. 현지서 경험한 영국 스타트업 글을 따로 쓸까 생각 중이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배달 음식으로 브리또와 치킨을 먹은 뒤 짐을 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나가야 해서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에든버러에서 런던 가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일정이었다. 비행기 놓칠까 봐 그 걱정만 했던 것 같다. 비행기 타러 가는 여정, 이동하는 여정도 여행이기 때문에 공항 기록과 함께 이것도 다음 글에 쓸 듯하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도. 여행이 이렇게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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