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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식 Oct 17. 2019

팔로봉에 서다!

25일: 폴라 데 아얀데에서 라메사(24km)

2019년 6월 16일(주일)

  

U-20 월드컵이 어제저녁에 있었다. 한국 시간은 새벽이었지만 여기 시간으로는  18시 넘어서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영주 씨가 어떻게 해서든지 보겠다고 이곳저곳을 뒤진 끝에 핸드폰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경기는 졌지만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 결승까지 간 경기는 처음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영주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 끝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군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끝에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 한번 가보라는 내 부탁을 면전에서는 거절하지 않고 “예”라고 답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들어주고 대답해준 영주 씨가 참 고맙다. 같이 길을 걷는 입장이니 나도 그도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아침이 밝았다.  

팔로봉을 넘는 날. 처음부터 오르막 길이다.

주일 아침이라 일정 시간은 혼자 걷고 싶었다. 

영주 씨에게 혼자 걸으면서 예배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도로를 따라 걷는가 싶었는데 도로에 그려진 화살표는 도로 옆 계곡으로 이어졌다. 깊은 계곡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계곡은 안개로 가득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개울 건너편의 산 정상도 하늘의 해도 안개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계곡에 딱 맞는 성경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걸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그중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다고 한다. 이때 ‘묵상’이란 말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얼거리다’란 뜻도 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하루 종일 입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하루 종일 입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중얼거리는 사람이 죄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계곡을 지나면서 시편 23편을 중얼거렸다. 그중에서 이 구절은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방이 하얀 안개로 덮이고 보이는 길만 의지해서 걸어가는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은 없었다. 

계곡은 빠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높은 산을 가장 빨리 오르는 비결은 계곡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계곡은 깊고 어둡다. 그래서 맹수들이 많다. 하지만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양을 비롯한 초식동물들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목자는 든든한 보디가드다.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맹수의 이빨과 발톱에서 지켜주기 때문이다. 

말씀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고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 속으로 말씀을 중얼거리며 올라갔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던 길은 끝도 보이지 않는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얼마를 갔을까 시간도 보지 못한 채 헉헉 거리는 숨을 내쉬며 올라가니 계곡으로 내려가기 전 걸었던 도로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조금 걷다 보니 맞은편 산길로 순례길은 이어졌다. 





안개는 해가 뜨면 사라진다. 

안개 덮인 계곡을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떠오른 태양이 안개를 물리치고 있었다. 아무리 짙은 안개도 태양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내지 못했다. 푸른 하늘이 보였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도로는 왼쪽으로 길게 반원을 돌며 나있었다. 그 반원은 다시 반원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올라갔고 팔로봉 정상에서 다시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계곡에서 쉬지 않고 올라와서 지친 몸을 오르막길 앞에서 잠시 쉬었다. 뒤를 따라온 영주 씨도 절룩거리며 내가 있는 곳에서 배낭을 내리고 쉬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내심 걱정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니 순응할 뿐이었다. 

저 소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다시 오르막길을 걸었다. 바람이 많아서인지 나무들은 높지 않았다. 사이사이 풀밭에는 어김없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도대체 저 소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우리처럼 걸어왔을까? 그럼 저 소는 질겨서 안 먹는 게 났겠네. 아니면 주인이 트럭으로 실어다 줬을까? 한두 마리도 아닌데 설마?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올라가니 1146m 팔로봉에 도착했다. 





등산 마니아는 아니어도 산 타는 것은 즐기는 편이다. 이따금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나 바람이 늘 좋았었다. 팔로봉에 도착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사방에 보이는 모든 봉우리들이 다 발아래에 있었다. 떠가는 구름도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올라본 사람만이 안다는 말이 딱 이거였다.

둘은 연신 핸드폰의 셔터를 눌렀다. 정말 좋았다. 적당히 부는 바람은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며 땀 흘린 몸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오른쪽을 보니 캄피에요에서 넘어오는 길이 보였다. 저 길을 통과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하루는 앞에 있겠지 하면서 오늘 목적지인 라메사로 출발했다. 

흔히 등산을 하면 올라갈 때 사고보다는 내려올 때 사고가 더 난다고 한다. 내려가면서 보는 경치도 좋았지만 발을 헛디디면 가파른 언덕에서 그대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길을 내려왔다. 


그늘도 없는 길을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이런 곳도 사람이 사는가 싶은 생각을 할 정도임에도 마을 표지판이 있었다. 자동차가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이 사는 곳인데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창고 같은 곳 처마 밑에서 잠깐 쉬고 있었다. 어제 우리가 건네준 부대찌개 국물을 먹었던 아일랜드 순례자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도 힘들었는지 우리를 보더니 배낭을 벗고 주저앉았다. 자기는 산티아고 순례길 여섯 번 걸었는데 이번이 제일 힘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처음이라고 했더니 깔깔 웃는다. 워낙 어리게 보여서 젊은 청년 같다고 했더니 모자를 벗어서 자기 정수리를 보여준다. 휑했다. 그리고는 오른쪽 손을 쫙 펴더니 자기 나이라고 한다. 영주 씨가 농담하지 말라고 하니 정말 50이라며 다시 한번 손을 활짝 편다. 

둘이서 “형~!” 하니까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연장자를 부르는 호칭이라고 하니 좋은지 웃었다. 


그늘 없는 순례길은 힘들다.

내리막길은 계속 이어졌고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쳐갈 무렵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소나무 향이었다. 앞을 보니 잘 가꾸어진 숲이었고 소나무 향이 가득했다. 익숙한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숲을 통과하니 소나무 향은 나지 않지만 높이 솟은 전나무 숲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전나무숲길도 그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숲길이 끝나고 베드루세도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소나무 향은 좋았다. 

이곳에서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샌드위치를 시켰더니 내 손바닥 두 배만 한 빵에 납작한 햄 한 장이 깔린 음식이 나왔다. 그러려니 하면서 시원한 콜라와 먹었다. 다 먹기에는 컸고 반을 남겨서 싸가지고 출발했다. 

참 단출한 샌드위치. 원래 이러니 뭐라 할게 못된다.

언덕을 넘어 마을을 빠져나왔고 길은 산줄기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 조그만 마을이 보였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보니 라메사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산줄기의 모퉁이를 돌면 다시 모퉁이가 나오는 지루한 길을 걸었다. 언제 이 길이 끝나나? 하면서 길을 도니 멀리 서너 채의 집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라메사였다. 힘을 내서 걸었지만 캄피에요 갈 때처럼 삼거리가 산줄기로 바뀌었다는 것 빼고는 희망 고문이었다. 네 개의 산줄기를 돌고 도니 라메사 입구였다. 









딱 보기에도 왼쪽은 공립 알베였고 오른쪽은 사립 알베였다. 우리는 공립 알베로 들어갔다. 관리인은 없었다. 이 층 침대의 아래층에 짐을 풀고 해야 할 일을 끝냈다. 빨래를 널고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듬성듬성 떠있는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발을 보니 물집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굳은살이 올라오면서 이전의 상처들은 딱쟁이가 되어서 뜯어도 될 만큼 굳어있었다. 생살과 연결된 부분이 아직 있어서 뜯지는 않고 발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하늘을 배경으로 발 사진을 찍었다. 

250. 남자 발 치고는 작다. 작지만 무척이나 훌륭히 지금도 잘 걷고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오늘로서 25일째 걷고 있다. 아프지 않고 10kg가 조금 넘는 배낭을 메고 이렇게 걸을 수 있다니. 


특전사에 근무할 때 천리행군 위문을 갔었다. 20kg이 넘는 군장을 메고 400km를 걸으면서 불시에 떨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면서 걷는 길은 정말 힘든 훈련이다. 그들이 걷는 길이 천리이다. 그때는 정말 힘들겠다 했지만 나도 천리를 넘게 걸어보니 그들이 겪었을 육체의 고통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에 있는 것이라곤 공립 알베 그리고 사립 알베와 그곳에서 운영하는 식당뿐이었다. 별 수 없이 저녁은 사립 알베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어야 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니 식당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순례자 여권을 달라고 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공립 알베 관리도 한다고 했다. 

어디에 앉을까 하는데 누군가 큰 소리를 “road friend”한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아일랜드 순례자였다. 같이 앉아있는 옆자리가 비어있었고 그리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식탁에는 영국에서 온 젊은 청년 두 명과 미국에서 온 할아버지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 분의 나이는 70이 넘었지만 팔로봉을 넘을 만큼 젊다며 힘자랑을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오랜만에 되지도 않는 영어로 오게 된 사연을 말했다. 다들 뻥 터졌다. 

두 할아버지는 가란다고 진짜 여기에 온 너도 대단하지만 너를 보낸 와이프는 더 대단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와이프가 너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잘하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니 잘 듣겠다며 웃었다.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잠시 뒤에 여태 보지 못했던 한 여성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뿌지직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그 여성도 자기 몸 일부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는지 동료에게 밑을 봐달라는 말을 했다. 나도 소리와 함께 눈을 떴고 위를 보았다. 이층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판들이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하체 부분을 지탱하던 나무판 한 개는 이전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위에 있던 여성의 몸이 밑으로 쳐졌고 나는 발을 들어서 그녀를 받쳐 주었다. 놀란 그녀는 동료의 도움으로 밑으로 내려왔고 나에게 연신 “sorry, sorry”를 해댔다. 괜찮다며 놀란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그녀는 나에게 어젯밤에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신경 쓸 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래층을 쓸 때면 늘 위를 받치고 있는 나무판을 두드려 보고 위에 올라가는 사람의 덩치를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침대가 오래되어서 그랬지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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