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동식 Oct 17. 2019

길이 들려주는 길에 대하여

26일: 라메사에서 그란다스 데 살리메(16.49km)

2019년 6월 17일(월)

     

안개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아침을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오늘은 안개와 같이 걷는 하루가 되겠네 하면서 길을 나섰다. 순례길은 알베 뒷산을 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약 30m 정도 올라가니 안개는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나 여기 있어! 하며 인사를 했다. 뭐지~~ 하면서 돌아보니 어제 넘어온 팔로 봉의 정상이 보이고 그 아래 계곡으로는 운해가 흐르고 있었다. 운해 위로는 태양이 뜨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광경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어제 넘어온 팔로 봉이다.

우리나라 높고 깊은 산 정상에서 촬영된 운해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저런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유유히 흘러가는 운해는 눈과 귀가 호강하는 시간이었다.


특전사 근무할 때 정년을 앞둔 원사 분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여단은 오래전에 천리행군을 백두대간 종주를 했단다. 설악산에서 시작해서 남으로 쭉 뻗어 내린 백두대간을 가을에 종주할 때면 단풍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니 이야기는 이랬다.

저녁에 행군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뒤에 있던 단풍이 추월해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하고 밤에 행군해서 추월했단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역전이 되어 있었고 훈련에 힘든 몸이었지만 단풍과의 경주는 재미있었다는 무용담이었다. 100프로 다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니 그때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갔으니 내려가야 했다. 운해 밑으로 내려오니 사방이 안개여서 조금은 갑갑했다. 조심조심 길을 내려갔다.



오늘은 댐을 지나는 순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길은 곧바로 가지 못하고 구불구불 돌아갔다. 댐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그런데 보이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큰 불이 이곳을 휩쓸었던 모양이었다. 큰 바위에도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매우 큰 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큰 불의 흔적은 댐까지 계속 이어졌다.

1042m에서 내려온 길은 댐이 있는 209m까지 이어졌다. 멀리서 보는 댐의 높이는 상당히 높았다. 댐을 지난 순례길은 다시 오르막길이었다. 제일 높은 곳의 높이가 834m였다. 오르막 길, 내리막 길, 구불구불 길, 도로, 진흙길 그리고 소똥이 범벅된 길까지 오늘 걸은 길은 짧은 구간이었지만 종합 세트였다. 구불구불 길은 도로를 따라 걷게 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오는 차를 볼 수 있을 만큼 길은 정말 구불구불했다. 그만치 걷는 이들을 지치게 했다.


살리메 댐.

군목 초임 시절 나는 양구에서 29개월을 보냈다. 지금이야 춘천에서 양구 사이에 도로가 잘 닦여서 30분이면 왕래할 수 있다.

하지만 2002년 당시만 하더라도 춘천 나가는 길목에는 헌병 검문소가 있었고 길은 2차로였다. 시간도 2시간 걸렸다. 2차로 길이 그나마 곧게 뻗어 있으면 좋으련만 길은 소양호를 따라서 구불구불 길이었고 오늘 걷는 길보다 더 심했다.

빨리 가려고 속도를 내도 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속도를 줄여서 커브를 돌다 보니 심할 때는 멀미하는 이들도 있었다.

월요일 쉬는 날이었다. 큰 아들에게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하니 “햄버거”그런다. 그래서 시장도 갈 겸 겸사겸사 세 식구가 춘천에 있는 롯데리아에 간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여담이지만 양구에 롯데리아가 생긴 것은 2004년 어린이 날이었다.

그 날 이후로 2사단 병사들이 12사단 병사들에게 너희 동네에 롯데리아 있냐는 말로 기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구불구불 지루한 길. 누군가 재치 있게 그려놓은 그림 덕분에 웃으며 걸었다.

그란다스 데 살리메를 앞두고 길은 양 갈래로 나뉘었다. 산으로 가는 길과 그냥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그래도 도로가 편할 것 같아 우리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차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은 한적했다. 그란다스 데 살리메 입구에서 공립알베까지 20여분 걸렸다.

마을을 통과하는 길을 걷는데 박물관이 있었다. 책에서 본 민속박물관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 박물관이 정말 있네 하면서 문을 밀어 봤지만 허사였다.

월요일이었다. 아쉬운 마음 가득했지만 어떡하랴. 알베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부부 순례자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문 앞에 가보니 14시에 문을 연다는 종이가 걸려 있었다. 10여분 남은 시간 배낭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무뚝뚝하게 생긴 관리인이 문만 열어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라는 손짓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아무런 말도 없어서 쭈뼛거리며 부부 순례자를 따라 들어갔다. 빨래를 널고 나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미리 사둔 스파게티를 요리해서 먹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순례자들은 속속 알베에 도착했고 그들도 남은 여유의 시간을 각자의 방식대로 보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는데 걸어온 길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례길 초반에 좋은 길, 나쁜 길은 의미가 없다. 길이 있기에 목적지에 갈 수 있으니 길만 있으면 된다는 글을 일기에 적었다. 그런데 오늘 걸은 길은 종합세트였다. 그리고 그 길들은 나에게 “네가 살아온 인생 같지 않니?”라고 묻는 것 같았다.

언제나 푸른 하늘과 좋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인생이다. 하지만 오르막도 있었고 계속해서 올라갈 것 같던 인생길이 내리막을 걸었던 때도 있었다. 지루하리만큼 끝도 보이지 않게 돌아가던 길도 있었다. 발이 빠지지 않을 만큼 진흙길 같은 때도 있었다. 사람인지라 힘든 길은 빨리 지나갔으면 했다. 올라가던 길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어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인생인가? 길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그 길을 어떻게 걸으며 누구와 걸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어서 들리는 마음의 소리는 이랬다. “이제는 다 포용할 때가 되지 않았니?” 곧 있으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는 50이다. 오늘 걸은 길은 그동안 편협했던 내 인생길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면 포용하고 껴안아야 하지 않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쉽지 않은 내면의 소리였다. 하지만 나이 먹는다 또는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이 먹어서도 포용하지 못하고 배척하면 결국 듣는 소리는 꼰대다. 아이들도 때로 나에게 꼰대 같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런 소리를 듣는 이유는 내가 편협해서이지 결코 아이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포용하면 그만이다. 길은 그렇게 나에게 말하고 또 말하고 있었다.


걷는다는 것. 걸음의 매력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목사님” 한다. 눈을 들어 보니 스님이었다. “스님~~”하면서 악수를 했다. 옆에 있는 영주 씨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했던 터라 곁에 있던 영주 씨도 인사를 했다.

스님은 나와 헤어진 뒤 히온까지 갔다고 했다. 거기서 여성분은 다리가 아파서 계속 북쪽 길로 갔고 자신은 버스를 타고 오비에도로 와서 오늘 이곳에 왔다고 했다. 사립 알베에 잠자리를 구했고 마을 구경을 하다가 들어왔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고 했다. 나도 걸어온 길 이야기하다가 고추장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도 고추장이 있다며 저녁에 부대찌개 먹자고 했다. 셋이서 슈퍼에 가서 그날 저녁거리와 과일과 내일 아침거리를 샀다.

스님이 지어주신 밥. 우리가 만든 부대찌개.

그날 저녁 부대찌개도 정말이지 맛있었다. 하지만 처음 먹은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원래 처음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니 말이다.

이전 05화 팔로봉에 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