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사람에 관하여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사랑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쉬운 만큼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말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맺는 모든 관계의 사랑에게 오직 너와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진은영 시인의 <청혼> 같은 사랑도 좋고,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같은 사랑도 좋고,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 같은 사랑도 좋다. 다만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내가 했던 사랑이, 내가 할 사랑이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기를 나는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느껴지는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정확한 이름을 짓는 일은 끝끝내 실패하겠으나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더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끼므로(7p)”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정확하게 “사랑”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고 “이것이 사랑이다(64p)” 선언하는 책이 아니라 “이것 또한 사랑이다(64p)”라고 말하는 책이다. 나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윤리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쓰거나 읽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는 있으나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65p)”
이 시도는 영화에 관해 적은 이 책에서도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80명이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할 때 20명의 “이것 또한 사랑이다”을 주목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그것이 이 책에는 있다. 그 시도가 이 책을 어렵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사랑을 “유일무이한 것(118p)” 것으로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해석이라는 작업의 이상(118p)”일 것이다. 타인의 사랑을 놓고 “이론과 개념을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사랑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118p)”
그래서 평론가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부여하는 “배치”보다 최대한의 개별성을 부여하려는 “해석”을 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일지 모른다. 보편적인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기에 쉽게 읽히겠지만 개별적인 것은 개인적이므로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창의적인 이야기 있다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인 존재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치와 편견은 이야기 속에서 유물을 캐내는 일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도구이지 않나 싶다. 난 언제나 나의 편견과 맞서며 작품(혹은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찾는다.
시(혹은 소설)를 쓰는 일도,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나의 편견과 맞서는 일이고, 그 건너편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