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에서도
나이가 들면 살기 위해 운동한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한다. 하지만 이것이 흔한 농담거리가 아님을 진짜로 나이가 든 후에야 알게 된다. 나 역시 퇴근 후 허물어져가는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간단한 운동을 시작했다. 장비도 대관도 짝도 필요 없는, 하늘이 내린 천상의 운동, 바로 러닝이다. 러닝은 하늘이 내린 운동이 맞다. 비가 오지 않고 적당히 선선한 날씨를 하늘이 점지해 주어야만 그날 러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온다.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흐릿한 시간, 이름은 모르지만 많이 들어본 익숙한 울음을 우는 벌레들의 시간, 그리고 우뚝 서 있는 건물을 색색의 조명이 휘감는 시간. 어둠이 내려앉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러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뛰기 시작하면 나는 걸을 때보다 더 시야가 좁아진다. 심할 때는 내 발끝, 보통 때는 내가 이다음에 내디딜 한 발자국 바로 앞 바닥을 응시한다. 나는 겁이 많다.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가려면 그 앞에 장애물은 없는지, 바닥이 움푹 패거나 불쑥 솟아 나오지는 않은지 미리 확인해야만 한다. 아마 내가 걷거나 뛰는 것을 보면 머리를 푹 숙이고 풀 죽은 채 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습관 덕분인지 넘어지지 않고 러닝을 잘해왔는데,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폐교 옆을 지나며 문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용기를 냈다. 밑바닥을 응시하던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려 두세 발자국 앞의 조금 먼 바닥이 보고 싶어진 거다. 어차피 매일같이 밟는 바닥인데 돌부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바닥은 평평하고 안전해, 라는 나름의 자기 안심이 있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날 갑자기 누군가 그 길에 벽돌을 무심코 놓았을 수도 있는데, 왠지 그날은 그렇게 해도 될 것만 같았다.
두세 발자국 앞은 가로등이 비치지 않아 그대로 땅밑으로 꺼져버릴 듯이 어두웠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골목길을 대낮처럼 환히 비출 만큼 가로등이 빽빽이 늘어설 필요는 없는 게 당연했다. 넘어지지 않을 거라는 거창한 믿음으로 뛰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자꾸 밑바닥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조금만 더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몇 발자국 그렇게 앞으로 뛰던 나, 그날의 나는 과연 끝까지 넘어지지 않았을까? 결말이 궁금하다면 투비컨티뉴드…
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거창하니 바로 결말을 공개하겠다. 예상한 대로 나는 그날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밑바닥을 보고 뛰던 예전하고 똑같은 결과였다. 생각보다 내가 나아가는 길은 겁을 내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했고, 혹시나 돌멩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내가 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거기다 빠져들어갈 것처럼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몇 발자국 앞의 바닥을 지나면 곧바로 가로등이 비치는 환한 지점이 나왔다. 내가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시간은 1초를 살짝 넘길 만큼 찰나에 불과했다.
안전하고 검증된 것, 과정과 결말을 모두 훤히 아는 것을 택하는 건 굉장히 영리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것을 선택한 순간 나는 더 이상 갈림길에 서지도, 갔던 길을 다시 돌아 나오느라 헤매지도, 낯선 길의 정답을 찾기 위해 손전등을 들고 나서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대부분 이것에 가까운 선택을 해왔는데, 그랬기 때문에 내게 가보지 않은 길은 실패, 좌절, 난관 등의 말과 동의어였다. 나이가 들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삶의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그동안의 내 선택이 모두 내게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님을 깨닫고 있다. 아직도 나는 가보지 않은 길에 온전히 뛰어들 용기는 없지만, 그것이 반드시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은 믿을 수 있게 됐다. 숨이 차올라서 더 이상 뛸 수 없을 것 같아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고 은은한 가로등 빛이 나를 비춰주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