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지인과의 약속이 갑자기 깨졌다. 아침 일찍 준비하고 설레기도 했지만, 아파서 못 나오겠다는 지인의 문자에 걱정하는 마음 위로 ‘아 오늘 하루는 여유롭겠구나’하는 마음이었다. 그 기분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 유난히 맑은 날씨의 햇살을 맞으며 걸었다. 목적 없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으며 여기저기 가보지 않은 길을 헤집으며 걸었다.
좋아하지만, 거리가 있어 잘 가지 않는 커피숍에서 라테를 한 잔 사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발걸음 옮겼다. 나만 빼고 모든 풍경이 빠르게 움직였지만, 홀로 가만가만 걷는 기분이 썩 좋았다. 가끔 이렇게 당일이 되어서야 약속이 취소될 때가 있다. 아침부터 바지런 떨어도 할 일이 없게 되어버린 기분은 때로는 오늘처럼 기쁘고 때로는 서운하고 속상했다. 그래도 이렇게 날씨가 좋을 때면 동네 한 바퀴 돌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뿌듯해져 속상한 마음은 쉬이 날아가곤 한다.
좋아하는 간식까지 몇 가지 들고서 돌아가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행복하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화장을 말끔히 씻어내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든다. 그리고 미뤄뒀던 드라마, 영화를 차례대로 보면서 남은 오후를 여유 넘치게 보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꾸 꾸벅꾸벅 잠이 오고 마는 거다. 깜빡 잠든 것 같은데 영화는 후반을 달리고 있고, 어디까지 본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 보기는 그만두고 침대로 자리를 옮겨 남아 있는 잠을 마저 잔다.
약속이 깨진 날은 갑자기 여유를 얻은 것 같아 이것저것 해보고 싶지만, 기껏 하는 거라고는 걷기 그리고 OTT보다 잠드는 거뿐이다. 그래도 오늘 하루 푹 쉬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부자리를 벗어날 줄 모른다.